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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만 보는 바보---이덕무와 그의 벗들 이야기

리첫 2013. 1. 24. 12:27

첫 번째 이야기--나는 책만 보는 바보

 

햇살과 책과 나

 

‘해님은 지금 어디쯤 와 있을까?’

 

아마 내가 예닐곱 살쯤 되었을 때일 것이다. 나는 마당에서 동무들과 어울려 흙장난을 하다가도, 방 안이 몹시 궁금하였다. 살며시 문고리를 잡고 열어 보았다. 해님이 방 안으로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다. 아직은 아니다. 좀 더 기다려야만 한다.

 

문을 도로 닫고 나온 나는 동무들 속에 다시 어울렸다. 그러다가도 조바심이 나서 마당과 방을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는지 모른다.

 

‘이제는 제자리에 오지 않았을까?’

 

또다시 방문을 열어 보았다. 아, 해님은 거기, 내가 벽에 그어 놓은 첫 번째 금 위로 마악 들어가고 있었다. 마음이 바빠진 나는 얼른 옷에 묻은 흙을 털고 대충 손을 씻은 다음 방으로 들어갔다. 무어라 나를 부르는 동무들의 볼멘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지만, 책 속에 빠져든 내 귀에는 오래 남지 않았다.

 

내가 읽은 책속의 옛 어른들은 날마다 시간을 정해 두고 책읽기에 힘써야 한다고 하셨다. 그러나 아직 어려 시각을 익히는 일이 서툴렀기에, 나는 어떻게 시간을 정해야 할지 몰랐다. 궁리 끝에 벽에 금을 그어 해가 지나간 자리를 표시해 두기로 했다. 내 나름대로 만들어 본 해시계였던 셈이다.

 

첫 번째 금에 햇살이 닿으면 방에 들어와 가장 환한 곳에 책상을 가져다 놓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면 햇살은 천천히 내 뺨을 지나고 목덜미를 지나 책장을 넘기는 손등까지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마음에 와 닿는 책 속의 글도 따스하고 얼굴에 와 닿는 햇살도 따스했다. 두 번째 금까지 햇살이 옮겨 가는 데는 아마 네 시간쯤 걸렸을 것이다.

 

햇살은 내 눈을 환하게 해주고 몸을 덥혀 준 것만이 아니었다. 햇살을 받아 환해진 책장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누런 종이 위에 놓인 검은 바둑알 같은 글씨들이 스멀스멀 일어나는 것만 같았다. 그럴 때면 책장의 보풀조차 한 올 한 올 일어서 눈부신 햇살 조각이 되었다.

 

햇살처럼 환하게 일렁이는 글씨들은, 어느 순간부터 사람의 모습이 되고 낯선 곳의 풍경도 되었다. 때로는 나에게 말을 걸어오기도 했다. 나도 마음속으로, 혹은 소리 내어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흐린 날에도, 등잔불이 희미한 저녁에도, 나는 그 햇살을 책 속에서 볼 수 있었다. 새로운 책을 대할 때마다 또 어떠한 햇살이 들어 있어 나이게 말을 건네고 마음을 따스하게 해줄지, 궁금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였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