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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만 보는 바보---이덕무와 그의 벗들 이야기

리첫 2013. 3. 13. 17:15

 

그 말을 알아들은 나는 책을 펼쳐 등촉 뒤에 세웠다. 과연 바람의 기세는 곧 수그러들고, 불빛도 흔들리기를 그쳤다.

 

맨몸으로 사나운 바람에 맞선 책이 미더워 보였다. 간혹 균형을 잃고 흔들릴 때도 있었지만, 곧 다시 추스르고 흔들리는 불빛을 다잡아 주었다. 그러면서 나에게 어서 마저 읽으라며, 다독여 주는 것이었다.

 

기분이 울적한 날이면 나는 조용히 앉아 <논어>를 읽곤 했다. 짤막하고 단정한 문장을 되풀이해 읽노라면, 어느덧 슬픔이 가시고 마음이 고요히 가라앉았다. 옛사람의 차분한 목소리가 내 마음을 다독여 주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논어>가, 제 온몸으로 등촉을 침범하는 바람을 막아 주고 있는 것이다. 옛사람의 따스한 마음이 책 바깥으로 스며 나온 것 같았다.

 

그때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가슴이 따뜻해진다. 마치 따스하고 포근한 이불을 덮을 때처럼, 미덥고 든든한 벗이 함께 있을 때처럼. 그날 밤 나는 분명, 나를 위해 이불이 되어 준 <한서>의 몸놀림을 보았고, 제 몸으로 바람을 막아 보라는 <논어>의 목소리를 들었다.

 

맹자에게 밥을 얻고 좌씨에게 술을 얻다

 

제 속을 모두 열어 보이고 온몸을 다해 나의 어려움을 덜어 준 책이었지만, 나는 몹쓸 짓을 하기도 했다. 벌써 오랜 전의 일이지만,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다.

 

거듭되는 흉년에 온 식구가 오래도록 굶주려 있을 때였다. 표정 없는 어른들의 얼굴도 그렇지만, 어린 동생과 아이들의 퀭한 눈망울은 더욱 애처로워서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아이들의 주린 곡기를 넣어 주어야먄 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방 안에 앉아서, 일곱 권이나 되는 <맹자:孟子 > 한 질을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처음 얻었을 때 천하를 다 얻은 것처럼 뿌듯하고 설레었던 기억이 생생하건만, <맹자>와 나의 인연은 그리 길지 않은 것이던가. 아쉽기만 했다.

 

지금이야 서가라 해도 좋을 만큼 어느 정도 책들이 채워져 있지만, 그때만 해도 내가 가진 책은 얼마 되지 않았다. 가장으로서 식구들의 생계조차 제대로 꾸려 가지 못하는 내 처지로 책을 산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물론 나 역시 귀한 책을 보면 갖고 싶고, 좋은 책을 보면 오래도록 내 곁에 가까이 두고 싶었다. 빌린 책이 아닌 나의 책에 마음대로 붉은 점으로 표시도 하고, 책 빈 곳에 생각나는 글귀를 마음껏 써 보고도 싶었다. 그러나 내게는 자주 허락되는 일이 아니었다.

 

아주 드물게, 어쩌다 여유가 생겨 책을 살 수 있게 되면, 몇 번이고 다시 살펴보았다. 두고두고 되풀이해 읽을 수 있는 책, 문장의 처음부터 끝까지 어느 하나 버릴 것이 없이 단정하고 아름다운 책이어야 했다. 그 무렵 내 방에 놓인 책들은, 모두 그렇게 고심한 끝에 고른 것들이었다. 그러니 내가 가진 책 한 권, 한 권에 대한 애틋함은 각별했다. 절대로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으리라, 나는 감히 장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