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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우물안 역사관

리첫 2013. 4. 2. 13:00

한국 및 동아시아 연구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쌓아 온 미야지마 히로시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한테서 이런 얘기까지 듣게 될 줄은 몰랐다.

 

“현재 일본이 거대한 역사적 전환점에 서 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바일 것이다. 내 생각으로 그 전환의 본질적인 내용은 일본이 다시 동아시아의 주변적 지위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한일병합’이 강행되던 100년 전은 일본이 동아시아의 중심으로 뛰어오르려고 하던 시기였다. 그 후 2차대전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동서냉전의 국제관계 속에서 미국의 종속적 동맹자로서 동아시아에서 중심적 지위를 계속 점하게 된 일본은, 이제 냉전의 종결과 중국의 부활이라는 상황에서 다시 동아시아의 주변국이 될 게 확실하다고 생각된다. 여기에서 ‘다시’라고 말하는 것은 19세기 중반까지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지위가 주변적이었기 때문이다.”

 

미야지마 교수는 이런 얘기를 일본 이와나미(암파)서점의 인문사회과학잡지 <사상>(시소)이 ‘한일병합’ 100년을 맞아 일본의 역사인식을 재검토하기 위해 기획한 특집호(2010년 1월)에 썼다. 그는 이 논문에 약간의 설명을 덧붙여 자신의 신간 <일본의 역사관을 비판한다>에 재수록했다. 미야지마 교수는, 문제는 일본의 주변화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돼 가고 있음에도 일본인들이 “주변화라는 미래를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고 종래대로 중심주의 패러다임에 안주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가 <사상>에 글을 쓸 무렵 일본은 공영방송 <엔에이치케이>(NHK)가 2년에 걸쳐 일본 국민작가라는 시바 료타로의 소설 <언덕 위의 구름>을 토대로 한 드라마를 방영했다. 근대 일본 성공의 결정적 전환기라고 할 수 있는 러일전쟁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한마디로 일본 찬가였으며, 드라마는 우파 지배세력의 ‘영광이여 다시 한번!’ 정서가 짙게 투영된 기획이었다. 일본군 성노예(위안부) 문제나 독도 문제, 재일동포나 북한에 대한 심각한 편견과 무지, 주변국들에 대한 근거 없는 우월감이 그 연장선상에 있다. 다시 권좌에 복귀한 아베 신조 자민당 극우 정권이 그 선봉장 노릇을 하고 있다.

 

<일본의 역사관을 비판한다>는 우파 이데올로그들은 굳이 거론할 것도 없다며, 바로 그런 국민의식이나 세계관 형성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일본 지식인들, 그중에서도 진보적 역사학자들의 잘못된 역사인식을 겨냥한다.

 

일본이 근대의 새로운 총아로 떠오른 러일전쟁 무렵부터 일본 역사학계에 일본 봉건제론이 등장한다. 그 핵심은, 아시아에서 일본만이 유일하게 봉건제라는 역사적 단계를 거쳤고 그것이 바로 유럽적 근대화를 가능케 한 일본의 특수성이라는 것이다. 일본 학자들은 식민침탈과 얽힌 일본 근대의 성공을 정당화하기 위한 장치로 일본 봉건제를 발명해냈다. 그들은 일본 성공의 결정적 요인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는 없는 것, 즉 봉건제라고 주장했다. 이는 일본이 아시아의 근대화를 선도해야 한다는 침략주의 옹호로 이어지고, 일본이 아시아 민족해방전쟁 지도자라는 가치전도로까지 나아간다. 그 선구적 인물이 ‘탈아입구’를 부르짖은 후쿠자와 유키치다.

 

전후 일본사 연구 거목인
이시모다 쇼나 마루야마도
조선과 중국 인식에선 저열

일본만이 아시아 유일하게
봉건제 거쳐 근대화됐다며
우월성의 증거로 날조한
‘탈아입구’ 선봉 후쿠자와의
서구중심 역사관 못 벗어나

 

미야지마 교수가 보기에 이는 당시 절대강자였던 서구를 모델로 삼은, 근거 없는 서구중심 역사관의 산물이다. 오랜 세월 군현제적 중앙집권체제가 정착한 중국, 조선과는 달랐던 변방 일본의 특수성에 서구적 봉건제 개념을 덧씌워 일본 우월성의 증거로 날조해낸 것이다. 미야지마 교수는 유럽의 봉건제조차 “(로마 등) 고대제국이 붕괴하는 가운데 출현한 아주 특이한 체제이자 분열적인 체제”에 지나지 않았다고 본다. 봉건제가 인류 근대화 도정의 보편적인 역사단계라는 서구중심적 개념 자체에 미야지마 교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중국의 경우 수·당대부터 송에 걸쳐 과거제도의 확립과 그에 따른 지식인 관료(사대부) 통치체제의 실현, 문관 우위 체제의 실현 등 수많은 혁신이 추진됨으로써 서구형의 분열형·분권화의 한계를 일찌감치 극복했다고 본다. 그는 서방 봉건제가 등장하기 훨씬 전에 정착된 동아시아의 군현제적 중앙집권체제가 훨씬 더 앞서간 것으로 본다.

 

군현제는 그것을 운용하는 인재(사대부)를 양성해야 하고 그들을 가려 뽑는 과거제도가 정착돼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책과 종이와 정보를 공급할 수 있는 문자와 인쇄기술, 제조업 기술, 그리고 고도의 사유체계·문화체계가 확립돼 있어야 한다. 그것을 뒷받침한 경제적 기초가 바로 가족노동을 토대로 한 생산성 높은 벼(쌀) 농법의 확립, 즉 소농사회의 출현이었다. 그 토대 위에 신분이 아니라 실력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는 과거제도가 출현할 수 있었고, 그것은 또한 군현제적 집권적 국가의 출현을 가능케 했다. 그리고 그 체제를 재생산할 수 있게 만들어준 상부체계가 바로 유교, 특히 송대에 등장한 개혁유교, 즉 주자학이었다. 미야지마 교수가 보기에 그런 체제를 가장 먼저 쌓아올린 동아시아야말로 지구상에서 가장 앞서간 문명이었다. 따라서 봉건제 유무로 역사의 발전단계를 논하고 서구 우월주의를 설파하는 것은 본말전도라는 것이다. 중국은 송대 이후, 조선은 조선시대에 그 과정에 들어갔으나 일본엔 과거제도, 문관 중심의 관료제도, 온전한 주자학도 없었다. 대신 인문적 교양이 부족했던 무사들이 지배했고 그들이 서구식 근대 모방의 주역이 됐다. 미야지마 교수는 임진왜란이나 근대의 식민침략 등 자주 무력을 동원했던 일본의 취약한 평화문제도 계급이나 인종, 신분을 초월해 주자학적 보편이상을 추구한 유교적 문명주의를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일본의 한계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한다.

 

그는 일본 전후역사학 확립에 큰 역할을 했던, 일본역사학 최고 걸작이라는 <중세적 세계의 형성>을 쓴 이시모다 쇼, 전후 일본사 연구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일본 정치사상사 연구>의 마루야마 마사오 등 진보학자들도 후쿠자와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으며, 그들의 조선 및 중국에 대한 인식수준은 저열했다고 지적한다. 주자학에 대한 인식수준도 그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는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류의 한국 내 ‘유교 망국론’은 동아시아 유교 자산을 제대로 따라갈 수 없었던 일본에서 역수입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일본 학자만이 아니라 <조선 봉건사회경제사> 등을 통해 조선 역시 서구적 개념의 봉건제 단계를 거쳤음을 입증하려 했던 백남운이나 이북만, 김석형 등 북쪽의 학자들과 조선 독자적 자본주의발전 맹아를 탐구했던 김용섭 교수 등 남쪽 학자들도 서구중심주의 사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봤다. 일본 식민사관에 대한 과도한 대항의식이 그들이 비판했던 대상들이 범했던 동일한 오류를 그들 자신도 범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