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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5--루비콘 직후

리첫 2014. 2. 16. 13:40

 

폼페이우스는 구체적인 해결책은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 마치 사회적 지위에서나 연령에서도 우위에 있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의 젊은 혈기를 타이르는 식이다. 하지만 사신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는 해도, 원로원 결의로 사실상의 독재관(딕타토르)이 된 폼페이우스의 친서다. 카이사르는 여기에 마음이 움직였다. 폼페이우스의 친서에 답장을 써서 법무관 로시우스와 루키우스 카이사르에게 맡긴 것이다. 글을 조목조목 쓰는 버릇이 있는 카이사르를 흉내내어 그 편지 내용을 정리하면,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본받아 공적인 의무 앞에서는 사적인 감정도잊어버리고, 국가 로마를 참사에서 구하는 방책을 생각한 결과”라고 전제해놓고, 폼페이우스에게 다음과 같은 해결책을 제안했다.

 

첫째, 당신은 임지인 에스파냐로 떠날 것.

 

둘째, 당신도 나도 휘하 군단을 해산하여 이탈리아를 비군사화하고, 그로써 국가 로마를 평상시의 정치체제로 돌려놓을 것. 즉 시민들을 군사적 공포에서 해방하고 민회에도 자유롭게 참석할 수 있게 한 뒤, 당신과 원로원이 나 카이사르의 집정관 입후보를 인정할 것.

 

셋째, 이상의 두 가지 방안에 관심이 있다면, 그것을 더욱 자세히 타합하여 세부까지 분명하게 결정하고 서약도 나누기 위해, 당신이 나한테 오든가 내가 당신한테 가서 양자 회담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

 

이것은 분명 ‘루카 회담’, 즉 정상회담 방식의 부활을 노린 제안이었고, 10년 전의 ‘삼두정치’ 체제가 단순히 카이사르의 즉흥적인 착상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반(反)카이사르파, 즉 원로원파가 가장 강력하게 반발하는 점이기도 했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에게 보내는 친서를 가지고 리미니를 떠난 로시우스와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플라미니아 가도를 급히 남하하여 수도에 도착했을 때, 로마에는 편지를 건네받을 사람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폼페이우스도, 현직 집정관 두 사람도, 원로원의 대다수 의원들도 수도 로마에서 달아나버린 뒤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