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달인전(200년전 이땅의)--정교(鄭喬)
영어달인전(200년전 이땅의)--정교(鄭喬)
1906년 9월 8일부터 10월 29일까지 학부 참서관으로 교장을 지냈던 정교(1856.7.8-1925.3.15)는 1898년 1029일 새문안 홍화문 앞 오궁터 윗동산 나무골에 서양 유학생 임병귀(林炳龜)와 시국관에 투철한 김신영이 출자하고 세계일주 후 신학문 교육을 통감하던 민영환(閔泳煥)을 교장으로 추대하여 설립된 흥화학교(興化學校)에서 임병귀, 남순희(南舜熙)와 교사로 있었다. 그해 11월에는 외아문 번역관인 교섭주사로서 개화기 교과서를 역편한 현채(玄采)의 아들 현공렴(玄公廉: “내쉬넬 독본”과 “영조자전독습<英朝字典獨習>”의 저자)에게 영어를 개인지도하기도 하고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 회원이었던 영어학교의 김덕구(金德九)와 흥화학교의 김한표(金漢杓)가 보부상(褓負商)과의 격돌 끝에 삽개에서 맞아 죽자 1898년 12월 1-2일에 장례식을 거행하여 주었는데 김덕구의 제문(祭文)은 영어학교의 퇴학생으로서 훗날 교관이 된 윤태은(尹泰殷)과 김우행(金佑行)이 읽었다
당시는 “믿지마오, 믿지마오. 부상들을 믿지마오, 두렵도다, 두렵도다. 독립협회 두렵도다...”라는 동요가 유행되었는데, 장용진(張庸震)도 19세 때 영어학교의 대표로서 종로 네거리에 높이 친 휘장 속에 대신(大臣)들을 세워놓고 남궁억(南宮檍), 유맹(劉猛) 등과 함께 성토를 했고 정교도 토죄(討罪)를 하였거니와 그 당시에는 의제를 토론하여 가부를 찬반으로 물었기 때문에 만민공동회를 “Yes and No Meeting”이라고 불렀다.
1898년 12월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시종(侍從) 정교는 화를 피하여 이듬해 8월 배재학당장 아펜젤러(Appenzeller)의 집에 피신하여 영어를 배우다가 1904년 돈의문(敦義門) 밖 성밑에 있던 집으로 돌아왔는데 배재학당의 기숙사에 있을 때는 주시경(周時經)이 정교에게 찾아와서 영문법을 배웠다. 와트(James Watt:1736-1819)는 40이 넘어서 독일어를 배웠다고 하고 스콧(Sir Walter Scott:1771-1832)은 56세에 히브리어(Hebrew)를 배웠다지만, 정교도 43-48세 때 배웠으니 늦공부였던 것이다. 흥화학교에 돌아온 정교는 영어과 우등생으로 교사가 된 이중화(李重華)와 교편을 잡다가 1906년 3월 한선사범학교장으로 있었는데 9월에는 군관학교의 자제들을 가르치려고 새문 밖 유동(鍮洞:지금의 충정로2가)에 있던 광흥학교의 교장으로 있으면서, 학부의 승인을 받아 한성소학교에 영어야학교를 설립하고 한백원(韓百源, 김전(金銓), 김영극(金永極)을 교사로 채용하였다. 당시 그는 이완용 학부대신 밑에서 참서관으로서 한성영어학교와 덕어학교, 한어학교의 교장을 겸직했는데 그 해 5월에는 냉동(冷洞)에 여성에게 영어와 신학문을 가르칠 양규의숙(養閨義塾)을 세웠으며 광흥학교가 윤치호가 빌려준 약현 교사로 옮기던 1907년 10월에는 곡산 군수로 가게 되어 광신상업학교장 곽태현(郭泰鉉)에게 인계하였다.
정교는 국내에서 대한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영어독학(英語獨學)”을 펴내던 해에 한일합방이 되자 망국대부라면서 망건 없이 상투머리에 갓만 쓰고 다니다가 이리로 낙향한 후 별세했다. 1895년에 수원판관도 지냈던 그는 이완용이 학생에게 삭발하고 일진회원 모자에 두루마기를 교복으로 입히자는 제안에 반대하였거니와 대동학교의 찬무원일 때도 유독 그와 이응익(*외부 교섭국장 출신)만 반대하다가 퇴직한 강골기질의 개화 영학자였다. 1908년에는 청파동의 문창학교(교장, 김중환)의 평의장으로 재직하였고, 한성외국어학교의 부교관 이온(李瑥)과 김광순(金光淳)이 지은 “일선화영자전(日鮮華英字典)”(신구서림, 1917)의 “서문”을 쓰기도 했으며,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1864년<고종 1년>부터 1910년 대한제국이 망할 때까지 47년간의 역사를 강목체로 기록한 책으로 한국 최근세사의 중요한 사료가 될 뿐만 아니라, 특히 독립협회의 활동상황을 상세히 기술하였으므로 이 방면의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홍경래전,” “가요선(歌謠選)” 등의 저서를 남겼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