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食傳(식전)--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리첫 2016. 8. 26. 10:18

食傳(식전)--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밥심’으로 산다

 

이팝이라 불리는 나무가 있다. 한여름에 하얀 쌀밥과 같은 꽃을 피운다고 해서 이팝나무라는 이름이 붙었고, 이 꽃이 소담스럽게 피어야 풍년이 든다 해서 사람들은 이 나무를 좋아했다. 배고픈 시절에는 흐드러진 그 꽃송이들이 하얀 쌀밥으로 보였던 것은 아닐까?

 

그보다 조금 못한 나무로는 조팝나무가 있다. 조팝나무는 이른 봄에 하얀 꽃을 피우는데 같은 하얀색 꽃이지만 관목인 까닭에 볼품이 조금 처지는 탓에 이팝나무보다는 초라하므로 조밥을 의미하는 조팝나무로 불린다.

 

탄수화물 없이는 허전해

 

먹는 것 하면 우리는 무슨 말을 가장 먼저 떠올릴까? 우선 ‘밥’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것이다. 이 ‘밥’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작은 의미로는 곡식으로 지은 밥을 뜻한다. 보리밥, 쌀밥, 조밥, 강냉이밥, 오곡밥처럼, 지은 재료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요즘의 일반적인 의미로는 쌀로 지은 밥을 이야기한다.

 

큰 의미로는 식사를 통칭한다. 밥과 반찬을 아우르는 한 끼의 식사를 밥 먹었다고 표현한다. 풍성한 식사도 한 끼의 밥, 김치와 밥만의 소박한 밥도 밥이다. 이는 되짚어 생각하면 농경시대 이후에는 주식의 비중이 그만큼 크다는 이야기이고, 반찬이 없는 밥도 한 끼의 역할을 해낸다는 것을 뜻한다.

 

곡식을 주식으로 하고 나머지를 반찬으로 삼는 것은 농경사회 이후에 전 세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유목민이나 수렵민처럼 짐승의 젖과 고기를 주식으로 하지는 않는 농경사회에서는 거의 다 곡식이 주가 되었다. 농사가 시작되면서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 거의 전부를 탄수화물 위주의 곡식에서 얻는 삶이 된 것이다.

 

쌀을 주로 재배하는 곳은 밥으로, 밀을 주로 재배하는 곳은 빵으로, 옥수수를 주로 재배하는 곳이면 옥수수를 가공해 주식을 삼는다. 구미의 육식 위주 식사가 확립된 것도 따지고 보면 2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으며 아직도 대다수 나라에서는 밥이나 빵을 먹지 않으면 무언가 허전하다는 느낌이 드는 게 일상이다.

 

지금도 나이 드신 어른은 아무리 푸짐한 반찬을 많이 먹었어도, 또는 빵이나 떡과 함께 풍성한 식사를 했어도 ‘쌀밥’ 한 그릇을 먹지 않고서는 밥을 먹었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밥 한 그릇 없는 식탁은 이상한 밥상이다.

 

그렇다면 예전 서민들의 주된 곡식은 무엇이었을까? 먼저 떠오르는 작물은 보리다. ‘보릿고개’라는 말 때문일 것이다. 이 보릿고개는 춘궁기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가을걷이를 하고 그 양식으로 겨울을 나지만 벼를 소작료와 세금으로 내고 나면 얼마 남지 않은 곡식으로 연명해야 했다. 보리를 수확해야 가을걷이 때까지의 양식을 해결할 수 있는데 아직 낱알은 영글지 않았다. 양식이 떨어지면 덜 여문 이삭이라도 베어다가 죽이라도 끓여 먹어야 할 참이다. 아직 아무 것도 수확할 수 없는 봄의 가장 어려운 때, 보릿고개는 이 시기를 뜻하는 말이다.

 

배고픈 놈이 이밥 조밥 가리랴

 

보리는 따뜻한 남도에서는 가을에 파종해 얼마간 자란 다음, 겨울을 나고 봄에 다시 생육을 시작해 초여름에 거둔다. 보리를 거둔 다음에는 논을 다시 갈아 물을 대고 모 심을 준비를 한다. 그렇다면 이는 이모작이 가능한 한반도 남부 지방의 사례일 뿐이다. 중부 지방으로 올라오면 이미 이모작이 어렵고 북부 지방은 아예 꿈도 꿀 수 없다. 요즘 보아도 겨울에 보리밭이 있는 지방은 거의 남부 지방인 삼남 지방뿐이다.

 

그렇다면 그루갈이가 되지 않는 북쪽에서는 과연 무엇이 이 보리를 대체하는 작물이었을까? 근대에 들어서면 벼농사를 짓는 범위가 한참 올라가 압록강 유역에서도 벼농사를 짓기는 하지만 그 이전에는 기껏해야 한강 유역을 넘지 못했다. 1930년 무렵을 예로 들자면 평안도와 함경도와 같은 북부 지방에서는 이밥을 먹을 정도면 무척이나 잘살던 집이었고 보통은 주곡이 좁쌀이었다.

 

좁쌀은 동북아에서는 무척이나 오래된 곡물이다. 한랭한 기후를 견딜 수 있게 생육기간이 짧으며 비교적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란다. 중국의 은주시대 황하 유역의 주곡도 바로 이 좁쌀이었다. 이는 이 식의 청동기에서 발견된 술의 찌꺼기가 좁쌀을 주원료로 했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증명되었다. 우리에게도 이 전통이 남아, 좁쌀로 담근 막걸리를 조의 껍데기가 떠 있다고 해서 조껍데기 술이라고 부른다.

 

우리말에서 좁쌀은 ‘알갱이가 잘은’ 쌀이라는 뜻이다. 좁쌀과 함께 주곡의 위치를 차지한 것은 기장이다. 기장과 좁쌀이 흔하지 않아 요즘 사람들은 잘 구분하지 못하지만 이 둘은 설로 교배가 되지 않는 확연히 다른 종이다. 낱알 크기는 기장이 좁쌀보다 조금 크다. 하지만 좁쌀과 기장은 모두 볏과 작물이다.

 

볏과의 대표 작물로는 강아지풀을 들 수 있다. 조밭을 보면 처음에는 강아지풀과 조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하다. 우리나라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이 강아지풀은, 지금은 먹는다는 생각을 할 수 없지만 곡식을 구경할 수조차 없는 흉년에는 구황식물의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야말로 마지못해 먹는 것이었으니 얼마나 깔깔하고 먹기 싫었겠는가.

 

기장이나 조 모두 거름을 많이 주지 않아도 잘 자라고 벼에 비하면 일조량이 적어도 되니 재배하기는 쉽지만, 수확도 많지 않고 입맛에 깔깔해서 먹기는 쉽지 않은 곡식이었다. 하지만 이 조나 기장도 떡을 만들거나 술을 만들기에는 훌륭한 재료였다. 여하튼 이 둘은 한반도의 북부 지방과 산간 지방에서는 더더욱 친숙한 작물이었으며, 심지어는 남쪽이라 하더라도 비가 금세 땅속으로 스며들어 논을 만들기 쉽지 않던 제주도에서는 주곡의 위치를 차지한 것이 바로 좁쌀이었다.

 

보리도 보리쌀이라 부르고, 기장쌀, 좁쌀이라 부르는 것을 보면 ‘쌀’이 곡식 낱알을 의미하는 통칭이지 벼를 뜻하는 칭호는 아니었나 보다. 여하튼 한반도에서 벼를 재배한 역사는 대략 기원전 2000년 전쯤으로 추산하고 있는데, 대개 고려시대쯤에는 이 잡곡 삼총사 보리, 기장, 조의 위치를 제치고 벼가 주곡의 위치를 점령한 것으로 잡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좁쌀과 기장, 보리는 실제로 지역에 따라 여전히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 채로 있었다. 쌀이 주작물이기는 하지만 지배층의 식량이었고, 보리와 좁쌀, 기장, 그리고 밀, 콩, 수수, 메밀 등의 곡식이 그 밑바탕을 떠받치고 있었던 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