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食傳(식전)-- 그 정도면 약과라니?

리첫 2016. 9. 3. 13:00

食傳(식전)-- 그 정도면 약과라니?

 

밀은 서양에서도 과자의 주요 재료였지만 우리나라에서도 밀은 이용한 과자들이 꽤 있다. 아마도 대표적인 것을 들자면 약과와 매작과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약과는 고려시대 유밀과의 일종이다. 지금은 약과만이 남아 있지만 고려시대에는 유밀과 종류가 몇 종이 더 있었다. 지금이야 과자들이 흔하지만 예전에는 무척 귀했다. 약과에 ‘약’자가 붙어 약으로 쓰이는 과자라니 얼마나 귀하면 그런 이름을 붙였겠는가.

 

우리나라에서는 누룩을 만드는 중요한 원료가 밀이었기에 재배하기는 했지만 그 생산량이 무척 적었다. 기후가 밀 재배에 잘 맞지도 않기도 하거니와 쌀, 보리, 조 등의 주곡생산이 워낙 중요했기에 생산량이 떨어지는 밀을 재배할 여유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쌀은 찰기가 많아 떡은 잘 될지언정 과자를 만들기는 어려운 곡물이었다. 과자에는 밀이 제격이었다.

 

약과와 매작과의 사례에서 보듯, 밀을 바탕으로 하고 여기에 그 당시로는 엄청나게 귀했을 식용유를 짜내 튀겼으며 게다가 귀한 단맛을 내는 조청이나 물엿까지 썼으니, 이 과자들은 엄청나게 귀한 것이었다.

 

예전에 기름을 짜려면 참기름을 짜듯이 볶고 압착해서 짜는 방법밖에 없었다. 여러 가지 씨앗으로 기름을 짜내었지만 가장 많이 쓴 것은 참깨와 콩이었다. 이렇게 압착법으로 기름을 짜면 요즘처럼 헥산을 이용한 화학공업의 방법으로 추출해내는 것보다 훨씬 비효율적이었기에 생산량이 얼마 되지 않는다. 지금 식용유가 흔한 데에는 신대륙에서 대량으로 재배되는 콩과 면화씨가 수입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탈유과정도 큰 몫을 한다. 그런 방법이 없던 시절의 식용유는 귀했다. 조청도 소중한 곡물을 엿기름으로 당화해 얻는 귀한 것이었다. 꿀도 생산량이 얼마 되지 않으니 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약과처럼 밀가루를 튀겨 만든 달콤한 과자는 아주 성찬일 때만 사용되었다. 고려시대에는 팔관회, 연등회, 혼례와 중요한 의례에 유밀과를 사용했는데. 귀족들의 사치 때문에 유밀과를 잔치에 너무 많이 사용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연회의 종류에 따라 이 유밀과의 그릇 수를 제한할 정도였다고 한다.

 

우리 밀의 새옹지마

 

지금은 흔한 약과지만, 그렇게 귀한 음식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먹으면 더욱 맛있을지도 모른다. 밀이 귀한 곡식이기는 했지만 우리에게 밀이 중요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술을 만드는 누룩의 원료였기 때문이다. 술을 만드는 데에 밀이 없으면 가장 중요한 발효제인 누룩을 만들 수 없다. 우리는 누구보다도 술을 즐기는 민족이었기에 밭의 일부를 할애해 밀을 심었다. 밀로 누룩을 만들며 좋은 술의 향기와 취한 기분을 상상했을 것이다.

 

밀이 우리에게 값싼 것으로 다가온 시기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헐벗은 우리를 먹여 살린 것은 미국의 잉여농산물이었다. 한국과 미국이 악수하는 그림이 그려진 밀가루포대들이 수제비와 국수로 변해 우리 뱃속으로 들어갔다. 밀이 신대륙의 캐나다와 미국, 그리고 아르헨티나와 오스트레일리아의 평원을 차지한 뒤로는 한동안 밀이 넘쳐흘렀고, 식량이 한참 모자라던 1970년대에는 우리에게 ‘분식’이라는 조금은 폄훼의 어조가 섞인 이름으로 다가왔다. 그러다가 정부의 강제시책으로 분식센터는 늘어갔고 차츰 밀가루는 빵과 국수로 변해 우리 생활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그 옛날 귀하던 쌀조차 남아돌게 된 요즘은 다시 존귀한 재료였던 ‘우리 밀’을 찾는다. 그동안 값싼 수입 밀에 밀려 밭 한 귀퉁이조차 차지하지 못했던 밀을 우리 손으로 가꿔 먹자고 한다. 그런 것을 보면 새옹지마라는 말이 저절로 떠오른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