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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속뇌--미운오리새끼

리첫 2016. 11. 9. 16:59

영속뇌--미운오리새끼

 

‘나는 영어의 신이야, 나는 달인이야, 나는 이제 영어에서 해방이야!’ 토익 900점을 넘긴 성적표를 받아들고 목구멍까지 가득 치밀어 오르는 영어에 대한 자신감을 주체하지 못했던 그날 저녁, 나는 흥겨운 마음을 억누르지 못해 후배와 함께 영화관을 찾았다. 영화가 시자하기 바로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제 토익 900을 넘었으니 영화의 모든 내용을 나의 이귀로 속속들이 들어내고야 말리라!’는 끝 간 데 없는 야심과 우쭐거림이 멈출 줄을 몰랐다.

 

그러나 영화가 시작된 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나의 오만과 방자함은 산산이 부서진 그대의 이름처럼 붉은 카펫이 깔려 있는 영화관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어떻게 안 들려도 그렇게 안 들릴 수가 있었을까? 지금 생각하면 나의 자만이 우습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내가 파악한 이유는 크게 2가지다.

 

첫째, 나는 일정한 형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문장들로만 영어를 공부했었다.

둘째, 나는 슬랭 같은 영어의 특수 표현들을 전혀 공부하지 않았었다.

 

이는 나뿐만이 아니라 영어를 상당히 한다는 사람이면 누구나 더 높은 수준에 오르기 전에 겪는 문제이다. 나는 중급 이상자들이 겪는 이런 문제점을 미운오리새끼라고 부르고 싶다. 미운오리새끼는 천덕꾸러기지만 꾸준히 관리하고 잘 키우면 언젠가는 백조로 변신하여 보는 이들에게까지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호수의 자랑거리가 된다.

 

하지만 미운오리새끼는 신경 써서 키우지 않으면 끝까지 오리인 채로 남아서 계속 미운 짓만 골라 하는 영어의 악동이 되어버린다. 특히 슬랭 같은 특수 표현은 따로 암기하지 않으면 알 방법이 없다. 유추하면 되지 않겠나 싶겠지만 유추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미국에 계신 우리 고모와 통화를 하다 보면 내가 가끔 쓰는 왕따, 얼짱, 중딩 같은 단어를 못 알아들으시는 경우가 왕왕 있다. 이런 말들은 아무리 한국어를 잘해도 한국에서 문화를 함께 공유하며 함께 생활하지 않으면 알아들을 수가 없다. 영어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He is an old timer.”라는 말을 듣는다면, “그는 구식이다.”는 뜻을 유추해볼 수도 있겠지만, “I am in the black.” 이라는 말을 들으면 “I am in~”라는 문장의 구조를 알고 있어도 숯검정을 바르고 있다는 건지, 컴컴한 방 안에 있다는 건지, 흑인이라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I am in the black.”에서 ‘black’은 경제용어로 ‘흑자’를 뜻한다. 즉, 이 말은 요즘 흑자를 보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표현은 수도 없이 많고, 따로 암기하지 않으면 영어를 아무리 잘해도 알아듣기가 불가능하다. 영어뿐만 아니라 한국어 역시 국어사전을 펼쳐보면 모르는 말이 태반이고 우리가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말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하물며 영어의 모든 것을 알겠다거나 알려주겠다는 것은 과욕이고 만용이 아닐 수 없다.

 

앞에서 나의 옛 토익 점수를 예로 들었다고 해서 토익이 영어에 도움이 안 된다거나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토익을 점수로만 생각해서 그렇지, 사실 토익은 잘만 활용하면 아주 훌륭한 가치를 발휘할 수 있는 유용한 시험이다. 또 토익 900점이면 전체 수험자들 중에서 1% 정도에 해당하는 실력이다. 그러나 이런 점수에 너무 연연하면 영어라는 넓은 바다에서 오히려 제 실력을 발휘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

 

900점이 아니라 990점 만점을 받아도 안 들리는 부분은 안 들리고, 발음할 수 없는 부분은 따로 연습하지 않으면 발음할 수 없다. 가르치는 사람이든 배우는 사람이든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완벽한 학습법’이 있는 것처럼 사람들을 현혹해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서는 지속적인 학습과 체험학습을 누누이 권하고, 단기간에 영어를 마스터할 수 있다고 꼬드기는 사기꾼들을 경계하라고 계속 강조하는 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