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만 보는 바보---이덕무와 그의 벗들 이야기(31~34쪽)
책만 보는 바보---이덕무와 그의 벗들 이야기(31~34쪽)
하지만 가난 앞에서는 그러한 확신도 맥없이 무너져 버렸다. 그나마 집안에서 돈과 바꿀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맹자” 한 질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돈 이백 전에 그 책을 내주고, 양식을 얻었다.
아이들의 얼굴에는 다시 핏기가 돌았으나, 나의 속은 더욱 쓰리고 아프기만 하였다. 책을 팔아서 먹을 것을 얻다니, 어느 하늘 아래 나 같은 선비가 또 있을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렇게 하면서까지 살아야 하나, 나에게는 책 한 질도 허락될 수 없는 사치였던가. 마음이 몹시 어지럽고 서글펐다.
그렇게 마음이 우울하고 심란할 때면 벗들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발걸음이 어느새, 내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유득공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늘 그렇듯 환하게 웃는 얼굴로 나를 맞이해 주는 벗을 보니,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먼저 흘러나왔다.
“자네, 오늘 내가 누구에게 밥을 얻어먹은 줄 아는가?”
“------.”
그는 어리둥절해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여느 때와 달리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데다가, 공연히 허둥대는 목소리가 이상하기도 했을 것이다. 하긴 흉년에 얻어먹을 데가 어디 있으며, 준다고 해도 내가 얻어먹을 주변머리나 있는 사람이던가.
“글쎄, 맹자께서 양식을 잔뜩 갖다 주시더군. 그 동안 내가 당신의 글을 수도 없이 읽어주어 고마웠던 모양일세.”
“아------.”
가느다란 한숨 소리와 함께 유득공의 얼굴에는 안타까운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나의 방에 고이 모셔져 있던 “맹자” 한 질에 대해서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책을 얻고 나서 아이처럼 들뜬 나는 벗들 앞에서 한껏 자랑을 했었다.
유득공은 얼른 서글픈 표정을 감추고, 이렇게 말했다.
“그래요? 그러면 나도 좌씨에게 술이나 한잔 얻어먹어야겠습니다. 그래도 허물없을 만큼 그의 글을 꽤 읽었지요.”
그러고는 책장에서 “좌씨춘추”를 뽑아, 아이를 시켜 술을 사 오게 하였다.
오래도록 비어 있던 창자였는지라 술기운이 빨리 올랐다. 불콰해진 얼굴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우리는 술을 마셨다. 술기운인지 울먹임인지 속은 자꾸만 메스껍고 헛헛한 마음에 객쩍은 소리만 흘러나왔다.
“일 년 내내 맹씨와 좌씨의 책을 읽어 봐야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구할 수 있겠는가? 제 식솔의 굶주림 하나 구제할 수 없는 것을.”
“그렇지요. 당장에 팔아 한때의 굶주림을 면한 우리가 차라리 현명하지요. 맹자와 좌씨도 잘했다고 할 것입니다.”
그는 기꺼이 맞장구쳐 주었다. 얼굴을 마주 보며 껄껄 웃기는 했지만, 웃음 뒤의 쓸쓸한 뒤끝을 우리는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다. 과연 그랬을까. 자신들의 오랜 사색의 결과물을, 양식과 바꾸어 배를 채운 우리의 행동을 맹자나 좌씨가 잘했다고 할 것인가.
차마 놓아 보내지 못하고 몇 번이나 표지를 쓰다듬고 있는 나를 바라보던 책은, 분명 재촉하는 듯했다. 아이들의 얼굴을 제 몸 위에 겹쳐 떠오르게 하면서. 그렇다면 맹자나 좌씨는 몰라도, 책은 그날의 행동을 나무라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함께 살면서 나의 생활을 들여다보아 너무도 잘 알고 있을 것이기에. 비겁한 위안일까.
나와 더불어 술잔을 기울이며 싱거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벗이 새삼 고마웠다. 흉년이라 어렵긴 마찬가지였겠지만, 그는 나처럼 굳이 책을 팔아야 할 처지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맹자에게 밥을 얻어먹었노라, 아무렇지도 않은 듯 떠벌리긴 했어도 내가 얼마나 서글프고 부끄러운 심정으로 찾아왔는지, 유득공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랬기에 선뜻 자신의 책까지 내다 팔아 나와 아픔을 같이 하고, 또 나의 부끄러움을 덜어 준 것이 아니겠는가. 그 역시 무척이나 책을 아끼는 사람이었으나, 나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것이 먼저였을 것이다. 이러한 벗들과 책이 있었기에, 나의 가난한 젊은 날은 그리 서럽거나 외롭지만은 않았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