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전(食傳)--공자를 좇아 개를 먹다
식전(食傳)--공자를 좇아 개를 먹다
우리나라 사정도 여느 농경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물고기의 원류인 맥적은 압록강과 만주 벌판을 누비며 사냥하던 선조들이 잡은 짐승을 맛있게 먹는 방법이었다. 맥적이 존재했다는 것은 콩을 이용한 장이 있었다는 이야기이니 이미 농경과 수렵이 함께 이루어지던 때의 일이다. 미처 양념을 할 여유가 없는 하인들이 높은 사람들 잔치에서 흘러나온 고기에 소금만 뿌려 구워 먹는 방자구이도 맛이 있었다.
무슨 고기인지는 수렵의 결과에 따라 달랐다. 멧돼지가 잡혔을 수도 있고 사슴이나 곰을 잡았을 수도 있다. 토끼나 꿩 같은 작은 동물이 많이 잡혔을 것이다. 농경도 하고 가축도 길렀기에 사냥 말고도 소와 돼지, 말과 같은 가축을 잡아 맥적을 해서 먹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수렵이 일상이 아닌 다음에야 늘 고기를 먹을 수는 없다. 잔치나 축제, 하늘에 대한 제사, 고사를 치를 때에나 고기를 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제사나 고사에는 희생을 드려 하늘에 비는 의식을 해야 했는데 이렇게 희생으로 바친 고기는 의식이 끝난 뒤에 나누어 먹었다.
나라의 제사라면 몰라도 마을의 제사라면 돼지 한 마리도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수 있다. 서민들이라면 고기는 여전히 접근하기 어려웠다. 한마을이라 해도 수십 호 남짓한 마을에서 돼지를 잡아먹기 위해 따로 사육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농사일도 바쁘고 사람 먹일 것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동물까지 먹일 엄두는 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서민들에게 고기는 명절이나 마을의 큰 잔치 같은 특별한 경우나 되어야 먹을 수 있는 것이었다.
소는 농사일에 긴요한 것이니 농사를 짓는다면 어떻게든 길러야 하지만, 여름철에는 주위에서 쉽사리 먹이를 구할 수 있어도 겨울철에는 쇠죽 쑤는 것도 커다란 일이다. 겨울철에도 소를 먹이려면 여름부터 가을까지 볏짚이나 꼴들을 잘 건조하여 미리 마련해두어야 했다. 그래야만 여물을 부족하지 않게 먹일 수 있었다. 농사를 짓는 일소는 소중한 일꾼이니 먹을 수 없지만 기르던 소가 죽는다면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했을 것이다. 만일 소를 잡는다면 한꺼번에 다 먹어치울 수 없으니 장포와 건포로 만들어 저장했고, 연기를 쐬어 훈연하면 보존기간이 늘어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예전에 우리에게 있었던 납육도 훈연한 고기를 이르는 말이다.
농경사회에서 서민들이 손쉽게 고기를 얻는 방법은 닭, 오리 거위 같은 가금이나 개가 으뜸이다. 가금은 알까지 얻을 수 있기에 심심치 않게 단백질의 부족까지 해결해줄 수 있었다. 개도 사람과 친근하다는 뛰어난 장점이 있었고 크기가 그리 크지 않아 먹이의 양도 많지 않으며 번식률도 높기에 여러모로 요긴하게 고기를 얻을 수 있는 대안이었다. 그러니 고기에서는 가장 오래전부터 식용하여 친근한 것이 무엇보다도 개와 닭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인도와 동남아시아가 원산인 닭은 삼국시대 신화에 나타나고 계림이라는 지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주 일찍부터 길렀다. 개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짐작하는데, 개는 원래 야생이 아니었지만 집에서 기르던 개가 가출하여 야생 상태로 있는 경우도 많았던 것 같다. 정약용이 흑산도에 가 있던 형에게 야생의 개를 잡아 보신하라고 권한 것을 보면 심심치 않게 야생의 개를 잡아 몸보신하던 풍습이 있었다. 성리학이 국가의 종지가 된 조선시대에는 개를 먹는 것이 더욱 환영받았다. 개고기는 공자가 먹던 음식이기에 개를 먹는 것이 바로 성현의 길을 좇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 활발하던 육식 습관이 점차 시들해진 것은 불교의 영향이었다. 삼국시대에 전래된 불교는 고려시대가 되면서 국교의 위치를 차지했고, 살생을 금하는 계율은 육식에 영향을 끼쳤다. 일본에서 불교가 천황의 종교가 되고 그 탓으로 거의 수백 년 동안 육식을 멀리 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도축 금지가 여러 번 되풀이되면서 육식의 풍토는 점차 희미해졌다. 하지만 이간의 고기 본능은 끈질겨, 권문세가에서는 따로 목장을 가지고 도축하여 먹는 등 그 풍토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이 육식의 풍토가 되살아난 것은 고려 말 몽골의 침략을 받으면서였다. 유목민족의 지배를 받으며 그들의 풍습인 육식도 자연스럽게 다시 받아들인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일본에서 육식이 발달하지 못한 것은 몽골의 지배를 피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불교를 배척함과 함께 육식 금기도 다시 깨졌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