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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의 자유교육<15>

리첫 2020. 10. 4. 11:11

 

 

 

그룬트비와 콜의 관계

 

자유학교와 시민대학의 정신적 기원은 그룬트비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룬트비는 시민대학의 사상적 기초를 쌓았고 아울러 자유학교를 위한 정신적 기틀을 마련했다. 하지만 그는 자유학교를 포함한 어떤 학교 형태보다 가정교육을 선호했다. 반면에 두 가지 학교 형태를 실제로 설립한 것은 콜이었다. 콜이 없었다면 오늘날과 같은 상황 전개를 기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때문에 보통 자유학교는 그룬트비-콜식의 학교로 지칭된다. 양자의 관계에대 대해서는 좀 더 상세한 논의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두 사람의 관계를 설명하는 방식은, 시민대학에 대한 그룬트비와 콜의 생각은 같은 맥락이고 콜이 이를 현실화시켰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차이점도 존재한다. 이를테면 두 사람 모두 책에 담긴 지혜를 혐오했고 인간을 살아 있는 말로 각성시키고자 했다. 다만 그룬트비가 인간으로서의 가능성을 불러일으키고 국민을 계몽시키고자 했다면 콜은 경건주의적 의미에서 기독교적 삶으로의 각성을 교육의 최우선 과제로 여겼다는 점이 다르다. 그룬트비가 생각한 학교에 종교는 있을 자리가 없었다. 종교는 가정에서 가르쳐야 할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콜은 계몽보다는 신앙적 각성을 우선시했다. 그룬트비가 계몽된 시민을 추구했다면 콜은 실천적 그리스도인을 추구했다.

 

그룬트비는 코펜하겐에 살았고 대학에서 가르치면서 좋은 교육을 받고 높은 식견을 가진 사람들이나 널리 인정받던 목사들과 교제를 나누었던 학자요 시인이었다면, 콜은 민중의 사람으로 단순한 사람들 사이에서 살았다. 그는 농부처럼 입고 다녔고 그들이 말하는 일상어를 구사했다. 콜은 책이라곤 어린이 학교(Om Bomeskolen)”라는 단 한 권을 남겼고 그것도 사후에 출판되었다.

 

콜은 민족과 기독교 신앙에 대한 그룬트비의 생각에 공감하고 어느 면에서 그를 따랐다고 볼 수도 있다. 아울러 정신적으로 빚진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의 어머니와 경건주의 설교가인 스케펜보어흐, 실존주의 철학자인 키르케고어 같은 이들이었다. 이 점에서 콜은 독자적 정신세계를 가진 사람이었다. 콜은 그룬트비 추종자들이 걸었던 길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시민대학 영역에서 그룬트비가 어머니 격이라면 콜은 아버지 격이라 할 수 있다. 콜은 자신이 살았던 시대에 각인되었기 때문에 그룬트비의 역사적-시적 환상을 따를 수 없었다. 시민대학은 그 때문에 그룬트비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형태와 내용을 갖추게 되었다. 시민대학은 기존의 일반대학에 대한 하나의 대안이다. 두 사람 모두 시험을 거부했고, 수업을 보편적 인간이라는 주제아래 강연과 이야기 나누기 방식으로 진행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콜은 시민대학을 농가 생활 구조로 만들어 제시했고, 감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인간 발달에 관한 견해에서도 양자는 달랐다. 그룬트비는 인간 발달을 아동기와 청소년기, 성인기의 세 단계로 나누었다. 아동기는 상상력의 단계, 청소년기는 감정의 단계, 성인기는 이성의 단계다. 청소년기는 시와 역사에서 끄집어 낸 살아 있는 말을 통한 깨우침을 위한 시기로 보았다. 그런 점에서 시민대학에 입학하려면 최소한 18세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콜은 농촌 청소년들과의 경험으로부터 18세는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 농촌의 청소년들은 파이프 담배를 너무 많이 피우고 호주머니 시계를 사는 데 관심을 기울인다. 청소년기는 시와 신화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 시기라고 보았다. 그래서 시민대학 입학 연령을 14세로 잡았다. 그러나 뤼스링에에서의 첫 번째 경험으로 콜은 자신의 생각이 옳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상 거론한 몇 가지 점에서 종종 그룬트비-콜 식의 학교라는 지칭에는 특정한 단서가 필요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런 전제 아래 초창기 자유학교들의 설립과 이후의 전개 양상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그룬트비와 콜의 사상과 활동은 순수하게 독자적이라기보다 당시 유럽에서 전개되던 다양한 정신사적 흐름의 맥락을 함께 하는데 주요 모티브가 된 것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