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기억 때문에 이소룡을 '리샤오룽'으로 적기가 어렵다. 이 정부의 인수위 시절에 이경숙 인수위원장의 '오렌지'(orange) 발음에 관한 소동이 있었다. 이 소동은 이경숙 위원장이 “새 정부는 'press-friendly' 정부인데, 이는 프레스 프렌들리가 아니라 프레스 후렌들리가 맞다”고 말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것이었다. 물론 이 소동의 기저에는 '영어공용화론자'들의 조급하고 미성숙한 '글로벌리즘'이 깔려 있는 것이어서 그 자체가 검토할 만한 문제가 한둘이 아니지만, 조금 거리를 두고 보면, 현재 국립국어원이 원칙으로 삼고 있는 '원음주의'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 하는 또 다른 중요한 논쟁을 안고 있는 사안이다.
어린이 학습지로 유명한 '씽크빅'은, 혀를 절반쯤 내밀면서 발음해야 하는 그 '씽'이라는 표기 자체가 마땅하지 않아서 '씽크 빅'이 된 것인데, 이를 단순 직역하면 '크게 빠트려라'하는 얘기가 된다. 이경숙 위원장이 '프레스 후렌들리'라고 해야 맞다고 한 것도 절반의 주장일 뿐이다.
'f' 발음의 표기가 'ㅍ'냐 'ㅎ'냐 하는 문제는 우리 현대사의 해결되지 않은 오랜 문제이다. '나는 60억 인구의 한 사람일 뿐'이라며 겸손의 보여주는 강철의 인간 이종격투기의 제왕 표도르(혹은 효도르)는 러시아어로 'Федор'이고 영문으로 'Fedor'인데 국내 신문에서는 '표도르'와 '효도르'를 엇갈리게 쓴다. 이런 표기의 혼란을 막기 위해 한글 창제 당시의 ㅂ순경음(ㅸ)이나 ㅍ순경음(ㆄ)을 사용하자는 의견도 있다.
쉽지 않은 문제다. 문제가 된 이경숙 위원장의 '오렌지' 발음에 대해서도 이를 다급하게 보도하는 여러 신문들은 '어린지', '아린지', '오뤤지' 등으로 표기했다. 이 원장이 담화 과정에서 '오렌지'를 이 셋 중 어느 쪽에 가깝게 발음했는지, 그리고 이를 가장 적절하게 표기한 게 어느 것인지도 불분명한 것이다.
압둘 자바와 연기하는 이소룡 현지 발음을 원칙으로 한다는 '원음주의'에 대한 비판으로는 일본이나 영어권의 예가 자주 등장한다. 일본인들은 맥도날드를 ‘마그도나르도’로 표기한다. 그들의 문자의 한계에 의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억지스럽게 원음주의를 따라가지는 않는다. 그들에게 빌딩은 그냥 ‘비루’다. 영어권 사람들이 프랑스인들의 발음인 ‘빠리’(Paris)를 시치미 뚝 떼고는 '패리스'라고 부르거나 우리가 '삼성'(SAMSUNG)이라고 '현지 발음'하는 것을 서구의 여러 나라들은 그들의 언어 관습과 표기에 따라서 '쌈쑹', '샘성', '잠중'이라고 표기한다.
2006년에 독일에 갔을 때, 바이마르의 작은 식당 주인은 나를 보고 '욘다이' 차가 정말 좋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욘다이는 우리같은 '현지' 사람들이 '현대'라고 부르는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았을 때, 북구의 격식있는 발표자는 '김다융'이라고 불렀다.
원음주의는 국립국어원의 원칙이다. 이 원칙이 거듭 논란이 되는 것은 1985년 12월에 외래어 표기법이 개정되면서 꽤 오랫동안 익숙했던 중국 지명과 인명의 표기가 바뀌었고 따라서 이를 발음하는 방식도 대대적으로 바뀐 다음이었다. 잘 아다시피 이때 이후로 천안문은 ‘톈안먼’이 되었고 주윤발은 ‘저우룬파’가 되었으며 모택동은 '마오쩌둥'이 되었다. 결정적인 문제는 이렇게 '현지 발음'에 가깝게 표기를 해도 우리 말에는 중국식의 '성조'(聲調)가 없기 때문에 굴곡 없이 '저우룬파'라고 말하면 이를 현지인이 알아듣지 못하는 수도 있는 것이다.
언어와 문자의 세계를 정밀하게 탐사해온 고종석은 "원음주의는 원칙상 옳고 자연스럽다. 우리가 덴마크를 丁抹이라고 쓰거나 '정말'이라고 부를 수는 없고, 워싱턴을 '華盛頓'이라고 쓰거나 '화성돈'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고 언급하면서도 '습관이라는 예외'를 예외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할 것을 주문한다. 일본을 '닛폰'으로 바꾸거나 중국을 '종궈'로 바꾸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고종석은 "원음주의라는 것이 습관을 강제로 바꿔야 할 만큼 대단한 원칙은 아닐 것"이라고 말한다. 이왕 언급한 김에 고종석의 글을 마저 인용하고자 한다.
이소룡은 70년대 십대 하위 문화의 아이콘이었다. "넓은 의미의 원음주의든 좁은 의미의 원음주의든 이 원칙이 우스꽝스러운 억압으로 변하는 것을 막는 것은 관습 존중의 태도다. 실상 우리는 대부분 무의식적으로라도 그런 관습 존중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우리는 '도이칠란트'보다는 '독일'을 선호함으로써 넓은 의미의 원음주의를 조롱하고, '스빠이'나 '스따일'이나 '어메리커'에 대해서가 아니라 '스파이'와 '스타일'과 '아메리카'에 대해서 이야기함으로써 좁은 의미의 원음주의를 비웃는다. 그것이 말들의 자연스러운 풍경이다. 그런 관습 존중의 태도가 깊이 뿌리를 내린다면, 가장 완고한 원음주의자조차도 감히 헝가리를 '마자르오르삭'이라고 부르자거나, 오클라호마는 틀린 발음이므로 '오우클러호우머'라고 표기하자고 제안하지는 않을 것이다."
단신의 이소룡이 거한을 물리치는 것은 짜릿한 문화 쾌감이었다. 다시 중국 얘기로 돌아가면 호서대 중문과의 김태성 교수는 지난 2007년 11월 2일 개최된 이 분야의 학술 토론회에서 "외국어의 인명이나 지명 표기에서 맨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독자 인식의 편의와 정확성인데, 국립국어원의 표기 방식은 독자를 혼란에 빠지게 만들고 중국어의 정체성을 살려 준다면서 '중국어의 왜곡과 파괴'를 유발한다"고 비판한 적 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예컨대 중국의 陝西(섬서) 山西(산서)는 우리식 독음으로 뚜렷히 구별되고 중국 성조 발음으로도 구별되지만 현행의 원음주의 외래어표기법에 따르면 둘 다 ‘산시’가 되어 버린다. 구별이 안 되는 것이다. 프랑스 사람들이 결코 그렇게 발음할 리가 없는 파리의 큰 상징 문을 '개선문'으로 부르거나 적으면서 중국의 天安門을 ‘톈안먼’으로 하거나 '珠江'을 한국어 발음 ‘주강’도 아니고 중국어 발음 '주장'도 아닌 '주장강'(珠江江)으로 부르는 것은, 김 교수에 따르면 '언어의 주체성 상실이 가져온 결과'라는 것이다.
중국 인명과 지명 발음에 관하여, 하나의 시행 규칙으로 되어 있는 '1911년 신해혁명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것도 적지 않은 논란이 있다. '이백'이나 '두보'의 중국인 후예가 '마오쩌둥'이나 '등샤오핑'이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신해혁명을 이룩한 손문(孫文)은, 혁명 이전에는 손문이었다가 혁명 이후에는 쑨원이 되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당산대형> 포스터 이 언어와 문자와 발음의 상호 관계에 대해 그리 밝지 않으면서, 주로 '비판적인 견해'를 두서 없이 적은 것은, 오늘 11월 27일의 인물에 대해서, 첫 문장을 쓰면서 수없이 지웠다 다시 썼다 망설였기 때문이었다. 말도 안 되는 비유지만 '비빔밥'을 '미밈맙'이라고 쓸 까닭도 없고 써서도 안 될 일이지만, 저 1940년의 오늘, 11월 27일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사람을 '이소룡'이라고 해야 할지, '리샤오룽'이라고 해야 할지 망설였던 것이다.
일단 앞에서 두루 소개한 의견에 비추어, '이소룡'이라고 표기하건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 1970년대 서울 변두리의 '동네 형'들이 우상으로 떠받들었던 이소룡을 '리샤오룽'이 맞는지 '이소룡'이 맞는지 생각하다가 그만 얘기가 조금 길어졌다. 차라리 '브루스 리'라고 쓰고 시작할까 했으나 이를 차선책이라고 부른다면, '차선책'을 모욕하는 일이 될 것이다.
아무튼, 오늘 11월 27일은 이소룡(李小龍, 본명 이진번 李振藩, 미국 명 Bruce Lee)이 미국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의 중국인 병원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서 태어나 홍콩에서 컸으며 고교와 대학은 미국의 시애틀과 워싱턴에서 마쳤다. 절권도 창시자인 무술가였고 배우였는데, 그 독특한 연기와 기합 소리와 발차기로 한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중국 사람들에게는 무너진 자존심을 세워준 민족주의의 우상이었고 서울의 변두리 동네 형들에게는 기묘한 '아웃사이더'의 전형이었다.
유작이 된 <사망유희> 포스터 그의 아버지는 광동식 경극 배우였다. 그래서 연기한다는 것이 이소룡은 자연스러운 가업의 하나였다. 일찍부터 영화를 접하였는데 18살 때 이미 20편 가량의 영화에 얼굴을 보인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요즘 할리우드에 진출한 몇몇 한국 남자 배우들이 그러하듯이 '미국 백인 남성 주인공'을 위협하는 동양인 갱 역할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백인 주인공을 공격하는 역할이 배역으로서도 성에 차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완강한 자존으로도 견디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유년기를 보낸 홍콩으로 가서 영화제작사 '골든하베스트'와 작업을 하게 된다. 그 첫 작품이 <당산대형>이었고 이 경천동지할 문화사적 사건을 필두로 하여 <정무문>, <맹룡과강>, <용쟁호투>라는 현대 무협극을 찍었다. 이소룡은 마지막 완성작이 되는 <용쟁호투>의 촬영을 다 마치고 후반 작업 과정에서 돌연 사망하였다. 그래서 최후의 유작이 되는 <사망유희>에는 생전의 이소룡이 직접 등장하는 분량이 15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는 시애틀의 공동묘지에 묻혔으며 장례식 당시 황홀할 만큼의 행동파 연기를 보여줬던 스티브 매퀸과 <맹룡과강>에서 호적수로 출연했던 척 노리스가 운구를 맡았다.
1976년에 서울로 전학을 왔을 때, 그 몇 해 전에 이사 와서 삼양동에 터를 잡고 있던 육촌 형네 집이 있었다. 그 집에 <월간 팝송>이 있었고 <썬데이서울>이 있었고, 그리고 쌍절곤이 있었다. 먼 훗날 서태지가 다니다가 때려치운, 그 공고에 다녔던 육촌 형은 초등학교 3학년인 내게 쌍절곤 시범을 보여줬다. 밤새워 제 몸을 불태워 가난한 집의 작은 방들을 데웠던 하얀 연탄이 그 형의 일타 일타에 산산히 부서졌다.
그 형은 자기의 주먹을 잘 보라고 하면서, 무협영화의 주인공처럼, 쫙 폈던 손을 순식간에 정권으로 접었다. 그때, 주먹을 쥐는 그 순간에, '슈슝'하고 바람 소리가 났다. 나는 정말 그 형의 손아귀에서 바람이 새어나오는 줄 알았다.
한 시대의 이미지가 된 <용쟁호투> 장면 그 동네에 '삼양극장'이 있었다. 어느 해 명절 날, 사촌 형제들하고 우루루 영화를 보러 갔다. 공교롭게도 2층 난간 바로 아래 쪽에 앉았다. 누군가 2층에서 침을 뱉었고 그것이 내 머리에 떨어졌다. 무슨 기세가 올랐는지 우리는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상대방 '패거리'(그래봐야 중학생 정도였는데)들은 쌍절곤을 슝슝 휘두르고 있었다. 사촌 누나 한 사람이 맹렬하게 맞싸웠고 나머지는 슬슬 뒷걸음질 쳤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아직도 의문인 것은, 그때 그 '패거리' 중의 하나가 허리춤에 공사용 청테이프를 차고 있었다는 점이다. 왜 그 아이들은 청테이프를 들고 다녔을까. 쌍절곤으로는 부족했던 것일까. 혹시나 그 당시 갱 영화에서 청테이프가 요긴한 소재로 등장했었던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맘에 들지 않는 녀석이라도 있으면 그 청테이프로 입을 막아버리고 온몸을 칭칭 감아버리려고 그랬던 것일까. 그 청테이프를 보란 듯이 허리띠에 차고 쌍절곤을 슝슝 돌려대던 '패거리'들을 혈혈단신으로 맞싸웠던 사촌 누나는 그때 정말 아름다웠다. 물론 사촌 누나도 중학생이었지만 말이다.
아흐, 옛 시절을 생각하니, 그립고녀, 어귀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영영 돌아오지 않을 시간들이여. 이런 날에는 이소룡 동영상 보면서 '짜장면'이나 시켜 먹는 게 좋을 일이다. 아니, '자장면'이었던가.
출처: 오마이뉴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