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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겉그림 김병택의 〈엉뚱한 역마살 인생〉 |
ⓒ 이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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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교 모범생이 사회 모범생이 되는 건 아니다
올해 6월 22일 나는 마천동 남한산성 아랫자락의 2층 건물에 교회를 창립했다.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한 꼴이었다. 서울에 연고지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형들이 셋이나 서울에 살고 있지만 다들 거리도 너무 멀고, 교회와도 가깝게 지내지 않아 도움을 받을 처지도 못 되었다.
현재는 개척을 했으니 담임목사지만 이전까지만 해도 늘 아랫사람으로 섬겨왔다. 94년도에 군 전역 이후 전남 장흥에 있는 교회를 시작으로, 96년도에는 전남 광주에서, 97년도부터 2002년 혼인 때까지는 전주에서, 2004년 봄까지는 인천에서, 2006년 여름까지는 충북 충주에서, 그리고 2008년 6월 초까지 경기도 하남에 있는 교회에서 사역하기까지 그야말로 전국을 빙빙 돌았다.
돌이켜 보면 중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껏 늘 모범생으로 산 것 같다. 시골 100여명도 안 되는 종합고등학교에서 언제나 나는 상위권에 속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별세하는 바람에 어머니를 도우며 효자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랫 동네 녀석들 몇은 하루가 멀다하게 가출을 해도 나는 좀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행복은 성적순도 아니고, 학교 모범생이 사회에서도 모범생이 되라는 법은 정녕 없었다. 그때 당시 나처럼 모범생 축에 속하는 녀석들은 직장에 다니며 한 단계 한 단계 밟아 가는데 반해, 건달처럼 활개치고 말썽피우던 녀석들이 오히려 훨씬 앞서 나가는 모습들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는 목회 세계도 엇비슷한 일들이 많다. 흔히 강신무들은 내림굿을 받고 무속 세계를 주름잡지만 세습무나 견습무들은 그저 한 계단 한 계단 배우고 익히며 나아갈 뿐이다. 목회 세계에서도 전혀 목회를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목회에 뛰어들어 그 세계를 주름잡는 경우가 많다. 그에 비하면 나는 아직도 세습무나 견습무에 해당되지 않나 싶다.
이런 고백들을 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올 6월에 창립을 하여 벌써 12월 막바지에 다다랐는데, 아직까지도 교인 수가 2명에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뭔가 신바람을 몰고 와야 하는데도 아직까지 파리만 나는 것 같아서 답답할 뿐이다. 이러던 터에 김병택의 대화체 소설 <엉뚱한 역마살 인생>을 대하게 되었으니, 뭔가 새로운 바람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2. 김병택의 대화체 소설 <엉뚱한 역마살 인생>
이 책을 쓴 김병택은 인생의 하프타임 전까지만 해도 별 볼일 없는 인생이었다. 중고등학교 때 모범생들이 흔히 말하는 깡패에다, 여자만 밝히는 날라리였다. 학교 공부는 담을 쌓고 지냈고, 패거리들과 어울리며 싸움질에 열을 냈다. 때론 동두천 산자락에 올라가 탄피를 주워 팔기도 했으니 세상 물정은 그때부터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런 세계에 물든 친구들은 의리 하나만은 끝내 준다. 내가 다니던 시골 학교도 그랬다. 어느 날 우리 학교 패거리들 몇 명이 인근 학교의 깡패들에게 당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그러자 우리학교 패거리들은 다음 주 토요일 날 그 학교에 찾아가 녀석들을 개 패듯 패 주고 왔다는 전설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인천에서 당한 김병택을 위해 그의 의리파 친구들이 복수혈전을 펼쳤다는 이야기도 꼭 그랬다.
그런 이야기를 하자니 이 책이 무슨 무협지나 삼류소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학창 시절을 거쳐 해병대에서 전역한 이후 아르헨티나에 뛰어들어 태권도 세계를 이끌며 혼인한 일이나, 이역만리 미국 땅에서 옷 가게 사업을 하며 빛을 발하던 일들은 그의 하프 타임 이후의 인생이 얼마나 성실하고 알찬 삶이었는지 여실히 증명해 준다.
미국에서 지하까지 합쳐 6백평 정도 되는 옷가게를 열 때에도 그는 백인들은 물론이요 흑인들까지도 섬세하게 대하는 태도를 잃지 않았다. 그 가게 앞에 원형 폭포를 만들고, 백 마리나 되는 잉어들도 담아 놓고, 멋진 음악 디제이(DJ)까지 두었으니 누군들 그곳에 들어서면 즐겁지 않았겠는가. 성탄절 때에도 다른 곳에서는 재고품을 진열해 놓는데 반해, 그는 더 좋은 새 옷으로 준비해 놓았으니 그 정신만큼은 두고두고 본받아야 할 자세인 듯 했다.
더욱이 한국 사람들이나 좋아할 법한 불가마를 미국 땅에다 도입할 생각을 했으니 정말로 뜻밖의 계획이었다. 그를 두고 주위에서는 무모할 뿐만 아니라 실패할 게 뻔하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하프타임 이전에 겪은 몇 차례의 실패 덕택에 한국의 케이에스(KS)와 같은 미국의 유엘(UL)마크를 획득하는 일이나, 공기로 온도를 올리는 시스템을 고안해 내기까지의 그 모든 수모와 난관을 힘차게 꿰뚫고 나갈 수 있던 그였다.
3.'하이 퀄리티' 자세로 고객과 사람을 대하라
모름지기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불굴의 개척자 정신이야말로 새로운 파라다이스를 여는 지름길이지 않나 싶다. 물론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데 있어서 프론티어 정신도 중요하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책 속에 들어 있었다. 그것은 곧 사업을 통해 이윤을 남기는 것보다 고객들을 더 따뜻하고 정성스럽게 대하는 태도와 자세였다.
"이윤을 남기는 것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어. 10원에 사서 20원에 팔면 장사 잘하는 거지. 그러나 진정한 장사꾼은 내가 어떻게 하면 고객들에게 편리하고 좋은 물건을 공급할까를 연구하는 사람이 하이 퀄리티로 장사하는 사람들이야. 즉, 한 수 위란 얘기지. 그렇다고 돈을 벌기 위한 하나의 목표만을 위해 정성을 다한다는 건 말이 안 돼. 모든 사람들을 진심으로 정성스럽게 대할 때 순리적으로 돈도 따라오고 좋은 사람들도 만날 수 있게 되는 거라고."(218쪽)
그의 멋진 모습과 태도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자기 자녀들만큼은 옥죄는 듯 키우지 않았고 생기발랄하게 자식들 하고 싶은 대로 키워나갔다. 더욱이 그의 아들에게 요구하는 바도 남달랐다. 무턱대고 자식이 요구하는 고기를 잡아 주는 게 아니라, 유대인들의 지혜처럼 그것을 잡을 수 있도록 그때마다 길을 제시해 주었다는 점이다. 우리네 기러기 아빠들이나 짐까지 싸매고 따라가는 엄마들과는 달라도 완전 다른 교육방식이었다.
끝으로 하나 더 감동적인 부분이 있다면 그의 남은 생을 정리하는 모습이었다. 그는 65세가 되면 자신의 재산 중 일부를 챙겨서 한국에 돌아와, 한국 사람들과 한국의 후세 양성을 위해 힘쓰겠다고 스스로 다짐하고 있다. 귀족에게는 귀족에게 걸맞는 사회적 책임이 있듯이, 그는 자신의 소유에 걸 맞는 것을 우리 사회를 위해 기꺼이 나누겠다고 공약한 셈이다.
사실 그렇게 공약한 사람도 드물지만 또 그렇게 실천한 사람도 많지 않다. 나도 그렇지만 가난한 어린 시절을 겪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의 소중함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사회에 내 놓겠다는 것은 말은 쉽지 실천하기는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도 역마살 인생 속에서 자수성가한 김병택 현 대뉴옥지구태권도협회 이사장이 인생의 끝머리에 그 일을 결행하겠다는 것은 대단한 의지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쪼록 무협지처럼 익살맞게 쓰여 있는 이 책의 내용들을 통해 나 스스로 깨달은 바가 많았다. 이제 인생의 하프 타임에 들어선 나로서는 더욱더 개척자 정신을 갖고, 다른 교회가 하지 않는 일에 뛰어들어야 할 것 같다. 뿐만 아니라 2명의 교우들이 있다 할지라도 하이 퀄리티 자세를 갖고서 정성스레 대해야 할 것 같다. 물론 그 일들은 나의 유익이 아닌 공공의 유익에 모든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그런 일들이 어쩌면 내게 일어날 새로운 바람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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