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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
‘일제고사’의 문제점을 알리고 이 시험을 치는 대신 ‘체험학습’을 선택할 수 있다는 편지를 학부모에게 우송한 교사 7명이 파면 또는 해임이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지금까지 ‘교원소청심사위원회’는 성희롱, 과도한 체벌, 금품수수 등으로 물의를 일으킨 교사에 대한 중징계도 감경하는 관대함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비리와는 질이 다른 사유로 중징계를 받은 교사에 대해서 이 위원회가 어떠한 태도를 보일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학생들을 전국적 등수 경쟁으로 몰아넣고, 교사와 학교를 학생의 성적으로 평가하겠다는 것이 바로 이명박 정부 초·중등 교육정책의 요체라는 점이 이번 사태로 인해 확인되었다. 얼마 전 정부는 ‘국제중’ 설립을 허가해 입시 열풍을 초등학교에까지 확산시켰다. 2012년까지 ‘자율형 사립고’ 수를 100개로 늘리겠다는 정책은 일반고를 ‘2류 고교’로 만드는 사실상의 고교입시 부활 정책인바, 이는 중학교에서의 입시경쟁을 더욱 격화시킬 것이다.
‘공교육 내실화’ 외치면서 ‘사교육 창궐’ 돕는 정부
정부가 겉으로 ‘공교육 내실화’를 말하지만 실제 시행하는 정책은 하나같이 사교육을 ‘창궐’시키는 정책뿐이다. 연간 사교육비 20조400억원도 부족하단 말인가. 사설 학원업체가 왜 공정택 교육감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는지 알 만하다. 정부는 교육에서의 ‘경쟁’과 ‘자율’을 강조하지만, 이는 교육의 양극화를 일으켜 교육을 통한 계층 상승의 기회마저 초반에 봉쇄하고 결국 사회통합을 저해하고 말 것이다. 대학은 특목고나 자사고 출신 학생에게 이미 직·간접 혜택을 주고 있지 않은가.
1986년 1월, 최우수 성적을 유지하던 15세 여중생이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이 사건은 영화로도 만들어져 우리 교육에 경종을 울렸는데, 그 뒤로도 성적 부담으로 인한 중·고교생의 자살은 끊이지 않았고 청소년 자살률은 세계 최고 수준이 됐다. 1989년 5월 ‘참교육 실천’을 내걸고 전교조가 출범하면서 수많은 교사가 해직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1994년 서태지는 <교실 이데아>에서 우리 교육의 현실을 통렬하게 조롱했다. “매일 아침 일곱 시 삼십 분까지 우릴 조그만 교실로 몰아넣고 전국 구백만의 아이들의 머릿속에 모두 똑같은 것만 집어넣고 있어” “됐어, 됐어, 이젠 됐어, 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됐어”라고. 그런데 2008년이 되어도 ‘0교시’와 ‘야자’에 시달리던 ‘촛불소녀’들은 “잠 좀 자자, 밥 좀 먹자”라고 외치며 거리로 나와야 했다.
민주정부 출범 이후 이러한 교육 현실을 개선하려는 노력은 계속되었지만 사육(飼育) 같은 교육 현실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아예 대놓고 ‘사육’이 바로 ‘교육’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 교육제도를 가졌으면서도 훌륭한 성과를 내는 나라가 있다. 이 나라 고등학교는 99%가 공립이고, 고등학교는 100% 평준화되어 있다. 학력이 뛰어난 학생과 뒤떨어진 학생이 ‘우열반’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대신 우수한 학생의 ‘월반’이 권장되며 부족한 학생에게는 일대일 교사지도가 이루어진다. 사교육은 존재하지 않으며, 방과 후 학생들은 음악이나 체육활동으로 바쁘다. ‘일제고사’가 없음은 물론이고 성적표에는 등수를 기재하는 난이 없다. 학교 간 편차가 매우 적기에 ‘강남 8학군’ 현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나라는 핀란드다. 이런 ‘하향평준화’ 교육을 했으니 학력이 엉망일 것이라고? 아니다. 핀란드는 세계 최고 수준의 학력을 자랑한다.
핀란드의 상황은 우리와 너무 차이가 나서 오히려 실감이 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학생과 학부모는 현재의 악몽 같은 교육 현실에서 자유로울 권리가 있다. 언제까지 학생은 새벽부터 밤까지 학교에 갇혀 아무 생각 없이 문제풀이를 해야 하고, 방과 후와 주말에도 각종 학원과 과외를 전전해야 하는가? 언제까지 학부모는 이러한 교육체제의 모순을 알면서도 자식들을 그 체제의 쳇바퀴 속으로 밀어 넣어야 하는 갈등과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가? 이제 학생과 학부모의 인권과 복지를 위해 새로운 교육체제의 꿈을 꾸어야 할 때이다. 그리고 전교조 활동도 ‘정치투쟁’이나 ‘통일교육’ 일변도가 아니라 학교와 교실 현장의 변화에 중심을 두어야 할 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