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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말문 틔우기 ‘다독’이 해법이다

리첫 2009. 1. 19. 13:15

영어 말문 틔우기 ‘다독’이 해법이다
뜻 해석 일일이 해주는 기존수업과 달리
쉬운 원서 여러번 읽히며 스스로 깨치게
유아땐 듣기, 청소년땐 읽기 중심이 효과
한겨레

서울 백석중 ‘방과후 영어 심화반’가보니/


< North America >, < We need direction >, < 100th day of school >….

김형주(14·서울 백석중)군이 최근 학교에서 읽은 영어 원서들이다. 출판사의 분류로 미국 초등학교 1학년 수준에 맞춰 나온 책이다. 책 한 권의 분량은 15쪽 안팎이며 한 쪽에 나와 있는 문장의 개수는 많아야 네 개를 넘지 않는다. 대신 상황을 상세하게 묘사한 그림이나 사진의 비중이 크다. 지난 한 해 중간·기말고사의 영어 성적 평균이 90점을 훌쩍 넘는 그가 이렇게 쉬운 책을 읽는 이유는 뭘까?

 

지난 14일 아침, 서울 백석중에서는 ‘방과후 영어 심화반’ 수업이 한창이었다. “What’s the meaning of orbit?(orbit의 뜻이 무엇입니까?)” 원어민 루카 비아노(39) 강사가 묻자 형주군이 “궤도”라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영어 단어는 많이 알지만 영어로 말하는 것은 어려운 모양이었다. 임인숙(49) 교사가 형주군을 비롯한 심화반 학생들한테 쉬운 영어 원서 읽기를 지도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지난 학교에 있을 때 영어 회화반을 원어민 교사와 함께 진행했는데 너무 절망했어요. 원어민과 유형화된 대화의 내용을 주고받는 회화 수업은 아이들의 입을 틔우지 않는다는 걸 안 거죠.”

 

올해로 교직 경력 26년째에 접어드는 임 교사는 중학교 3학년이 되는 딸의 성공 사례에 주목했다. 딸은 ‘다독’을 통해 영어를 깨쳤다. “대여섯살 때부터 영어 책을 많이 읽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어요. 알파벳도 가르치지 않았고 학원 한번 보낸 적이 없지만 어느 순간 어려운 단어를 척척 알고 영어로 의사표현을 하더라고요.”

 

겨울방학 동안 심화반 학생들과 진행하는 수업은 ‘다독 프로그램’의 예행연습 격이다. 수업에서는 하루에 책 한 권씩을 읽는다. 비아노 강사가 직접 책을 읽어 준 다음, 학생들이 혼자 읽고, 마지막으로 비아노와 함께 책을 따라 읽는 순서로 진행된다. 교과서로 하는 수업과 가장 큰 차이점은 문장을 해석하거나 어휘의 사전적 정의를 교사가 가르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학교 수업처럼 문장 하나하나를 상세하게 해석해 주지는 않을 거예요. 대강의 내용을 파악했으면 집에 가서 여러 번 읽어보세요. 그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임 교사가 수업을 마무리하면서 하는 말이다. 수업이 끝나면 학생들은 서너 권씩 책을 빌려간다.

» 다독이 영어 학습의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독서 많이 한 사람은 당해 낼 재간이 없어요. 국어나 영어나 마찬가지예요.” 서울 백석중 임인숙 교사의 말이다. 사진은 지난 14일 열린 백석중 영어심화반 수업의 원어민 교사 루카 비아노씨와 학생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임 교사뿐만 아니라 영어의 해법을 다독(extensive reading)에서 찾는 교사들이 많다. 전남 순천 금당중의 김미정 교사는 2005년 영어다독반을 꾸려 21명을 대상으로 다독의 효과를 측정하는 연구를 진행했다. 3월부터 10월까지 영어다독반을 운영한 결과 다섯 명을 뺀 열여섯 명이 모두 1학기 중간고사 성적보다 2학기 중간고사 성적이 올랐다. 김 교사는 “영어 교육 연구자들은 언어 습득의 결정적 시기를 사춘기 무렵으로 보는데 이때는 뇌가 스펀지처럼 다양한 언어 정보를 빨아들인다고 한다”며 “이때 다독을 통해 영어에 많이 노출이 되면 언어의 네 기능을 고루 발달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다독이라는 읽기 활동은 결국 말하기·듣기·쓰기 등의 다양한 능력을 키우는 ‘통합적 학습’에도 기여한다는 말이다.

 

사실 영어를 외국어로 배우는 이들한테 ‘읽기’의 중요성은 ‘원론’에 가깝다. “모국어는 듣기가 먼저다. 주변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흉내내기를 하면서 말문이 트인다. 읽기와 쓰기는 그다음이다. 하지만 외국어는 듣기보다 읽기가 먼저다.” 최근 유아나 초등 저학년 부모들한테 영어 테이프 등을 활용한 영어 학습법이 인기를 끄는 것은 영어를 모국어처럼 습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알파벳과 발음 등을 익힌 중학생들은 외국어 학습법에 따라 ‘읽기’를 중심에 두는 게 효과적이다.

 

특히 읽기 중에서도 ‘다독’에 교사들이 눈을 돌리는 이유는 정독(intensive reading) 위주의 영어 교수법이 지니는 한계를 알기 때문이다. 국제영어대학원대학교를 다니며 <중학영어 스토리북으로 잡기>(국제영어대학원대학교 스토리북 연구회 지음, 국제영어대학원대학교 출판부 펴냄)를 쓴 이은미 경기 광주 중앙고 교사는 “학생들이 중학교 3년 동안 영어 교과서를 통해 읽는 독서량은 얇은 영어 원서 한 권 분량에 그친다”며 “미국 학생들의 독서량과 비교해 보면 외국어로 영어를 공부하는 우리 학생들의 읽기 분량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말했다. 교과서와 문제집에 나온 지문을 읽어서는 학교 시험 성적을 올릴 수 있을 뿐, 영어 실력을 키우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 셈이다.

 

다독하기 위해서는 ‘수준에 맞는 책’을 고르는 게 중요하다. 100단어 정도를 읽었을 때 모르는 단어가 다섯 개 안팎이면 자기 수준에 맞는 책이다. ‘흥미에 맞는 책’을 읽는 것은 다독의 또다른 원칙이다. 따라서 학생들의 다독을 지원하려면 학교가 영어 원서를 다양하게 보유해야 한다. 김미정 교사는 다독반을 운영하며 400여권의 영어 문고를 만들었다. 임인숙 교사 역시 심화반 수업을 열기 전에 학교의 지원을 받아 360여권을 구입했다.

 

다독을 시작할 때는 수준별로 구성된 시리즈물을 활용하면 좋다. 이런 책들은 어휘의 난이도에 따라 수준이 갈리는데, 쓰이는 어휘를 책 전반에 걸쳐 통제하므로 책 한 권을 읽으면 어휘의 다양한 쓰임새를 학습할 수 있어 좋다. 책의 성격에 따라 시제·가정법·조동사 등 특정 문법을 집중적으로 접할 수 있어 문법을 자연스레 배우는 데도 도움이 된다. 이은미 교사는 “영어 원서라고 하면 우리나라 출판사에서 내는 영어 문고판을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데 요즘에는 다양하고 재미있는 영어 원서가 아주 많이 나와 있다”며 “특히 청소년이 좋아할 만한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딱딱한 교과서 본문으로는 느낄 수 없는 영어에 대한 흥미를 준다”고 말했다.

 

진명선 기자 edu@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