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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앓는 ‘학벌 출세론’ 내력과 처방

리첫 2009. 1. 31. 09:42

한국인이 앓는 ‘학벌 출세론’ 내력과 처방
한겨레 김일주 기자
» 1960년대 군사정권은 과외수업을 금지시켰지만 과외수업은 계속됐다. 1967년 부산에서는 과외공부를 끝내고 밤늦게 귀가하던 초등학생이 살해되기도 했고, 비슷한 시기 서울 덕수초등학생 4명이 가출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인물과사상사 제공
〈입시전쟁 잔혹사〉
강준만 지음/인물과사상사·1만3000원


강준만 교수 ‘대입전쟁’ 역사 짚어
“일제때 벌어진 교육구국운동
개인·가문 번영 도구로 변질”
서울대·연고대 소수정예화 주장도

‘억울하면 출세해야지!’

 

건강한 사회라면 ‘억울하면 바로잡자’가 되어야 할 텐데,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이 한국 사회에선 훨씬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출세’라는 개념이 오늘날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 건 일제가 친일파 지식인을 적극 육성하던 1920년대 중반부터였다고 한다. 일본에서 ‘출세’라는 용어가 수입돼 ‘재가자가 스님이 되기 위해 집을 떠난다’는 본디 뜻과는 정반대의 뜻, 곧 ‘세속적 성공’이라는 의미가 당시 새롭게 보태졌다.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 백성이 ‘입신양명’의 ‘양명’ 대신 택한 게 ‘출세’였다. 1924년 문을 연 경성제국대학에 다니던 극소수의 조선인 학생들은 식민지 고등관료로 진출하기 위해 고시 열풍에 몸을 던졌다. 해방 후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 문정관으로 일했던 그레고리 헨더슨은 <소용돌이의 한국정치>에서 “일본인들은 공식적으로 고등교육을 확대된 관료기구의 고속도로로 이용했으며 더욱이 자신들이 독점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조선인들의 식욕을 돋우는 구실을 했다”고 썼다.

 

이미 조선시대 초기부터 과거시험의 출세도구화와 아들의 출세를 존재 근거로 삼는 어머니 중심의 ‘자궁 가족’ 기본구조는 사회의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이 바탕 위에서 일제 식민지 시대에 벌어진 교육구국운동은 개인과 가문의 번영을 위한 각개약진 운동으로 변질됐다. 일제강점기와 미군 점령기를 거치면서, 다시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교육출세론’은 한국인들의 뼈에 깊이 각인됐다. 전통적 지배세력과 이를 받쳐주던 사회구조가 무너지고 학력을 갖춘 이들의 계급이 수직상승하는 걸 보면서, 학력과 학벌이 해방 뒤 친일 경력에도 면죄부를 주는 강력한 방패 노릇을 하는 걸 목격하면서, 모아둔 재산이 전쟁으로 파괴되고 약탈당해도 학력만은 온전한 걸 재확인하면서, 1960년대 들어 “좋은 학교에 들어가는 건 사실상의 계급투쟁이자 권력투쟁”이 됐다. 교육정책도 철저히 ‘1류’ 위주로 돌아갔다.




1970년대에는 “학력과 학벌로 기를 죽여 기존 체제에 대한 저항을 무력화시키려는 시도”가 노골적으로 벌어졌다. ‘공돌이’, ‘공순이’로 불리며 모멸감을 삼켰던 ‘못 배운’ 노동자들은 탄압을 성토하는 전단을 낼 때도 “배우지 못해 아는 것은 없지만 불의와 타협할 수 없었고…”라며 은연중에 교육받지 못한 사람은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교육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고 있었다. 1980~90년대를 거치며 입시전쟁은 더욱 잔혹해졌다. ‘기러기 아빠’, ‘펭귄 아빠’가 등장하는 2000년대에도 상황은 점입가경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회 전반의 문제해결 의지와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사교육 과잉과 입시전쟁은 정치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대중은 정치라는 ‘공적 해결방식’ 대신 각개약진식의 ‘사적 해결방식’을 택했기 때문에 정치에 관심과 시간을 투자하지 않기 때문이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쓴 <입시전쟁 잔혹사>는 이렇듯 한국 사회의 광적인 교육 열풍과 입시문제의 원인을 역사적으로 짚어가며 “모든 문제의 몸통은 대학이고 입시전쟁과 사교육은 그 증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한국에서 가장 치열한 계급투쟁은 노동운동이 아니라 대학입시 전쟁이며, 그 원인은 이른바 ‘스카이’(SKY) 출신들이 사회의 요직을 독점하는 데 있다고 지적한다. 이는 강 교수가 1996년에 펴낸 <서울대의 나라>를 비롯해 그동안 다양한 매체를 통해 여러번 주장해왔던 바다. 그는 여기에 보태 자신의 주장이 이제까지 ‘서울대 폐교론’으로 오해됐다고 지적하며 서울대와 연세대, 고려대의 정원을 단계적으로 대폭 줄여 소수정예주의로 만들자고 제안한다. 각 분야 엘리트의 출신 대학 구성을 다양화하면 대학 서열에 유동성이 생기고, 대입전쟁의 열기를 대학에 들어간 이후로 분산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이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비판에 그는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식의 근본주의적 대응이 오히려 학벌주의 완화를 ‘하향평준화’라 비판하는 전형적 엘리트들의 주장을 강화하고 있다며 현실적인 해결책을 낼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김일주 기자 pear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