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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개성 되살릴 번역 비책은?

리첫 2009. 2. 14. 16:09

한국어 개성 되살릴 번역 비책은?

윤민용기자 vista@kyunghyang.com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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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탄생…이희재 | 교양인

‘직역이냐, 의역이냐.’ 번역을 업으로 삼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고민하는 딜레마이다. 저자 역시 그랬다. 20여년간 영어뿐 아니라 일본어, 독일어권의 책을 한국어로 번역해온 그도 처음에는 원문의 결을 살려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러나 번역을 하면서 한국어가 가진 개성에 눈떴고 너무나 많은 외국어의 흔적이 남아 있음을 깨달으면서 매끄럽게 우리말로 길들이는 의역을 하게 됐다. 책은 바로 그러한 고군분투의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언뜻 보기엔 번역가를 위한 실용매뉴얼 같지만, 섬세한 우리말 어법책이면서 동시에 번역의 문화사도 아우르고 있다.

전통적으로 한국은 직역을 우선시 해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한국어의 개성은 사라지고 점차 외국어와 외래어가 토박이말을 밀어내고 한국어의 어법과는 다른 번역투의 문장이 일상생활에서도 흔히 쓰이게 됐다. 한국어는 대명사보다 명사를, 명사보다 동사를, 형용사보다 부사를 중시한다. 추상명사가 주어로 오는 것은 좋아하지 않고, 구체적이고 섬세하게 문장의 뜻을 드러내는 부사가 발달돼 있다. 그러나 지난 100여년간 일본어, 영어 등이 유입되면서 동사의 명사화, 부사의 형용사화가 진행되고 한국어에는 없던 과거완료 시제와 수동태형 문장, 조사 ‘~의’의 비중도 늘었다.

저자는 우선 바른 우리말에 맞는 문장론을 예문을 들어 친절히 제시한다.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인 번역을 위해서는 단어의 1차적인 뜻에 얽매이지 말고 유사한 의미를 갖는 우리말 단어 중 취사선택해야 한다는 조언도 뒤따른다. 이를테면 ‘suddenly’는 ‘갑자기’로 번역되지만 상황에 따라 ‘홱’ ‘불쑥’ 등 적절한 우리말 부사로 바꾸는 것이 좀더 실감나고 구체적이라는 것이다.

자국어에 충실한 의역은 모국어에 자신감을 가질 때, 경제·문화적인 배경이 풍성해질 때 나타난다. 르네상스 시대, 그리스 고전에 충실하게 직역하던 프랑스의 번역 전통은 절대왕정 이후 프랑스어에 충실한 의역을 선호했다. 프랑스의 자국어에 대한 자부심은 오늘날도 여전하다. 근대 일본의 번역사도 상황이 다르지 않다. 저자는 오늘날 우리가 쓰는 한자어의 90% 이상이 근대기 일본에서 만들어진 외래산 근대어이기 때문에 이제는 스스로 전통을 쌓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20세기 초만 해도 영국 선교사들이 조선인과 만든 영한사전을 보면 anniversary는 ‘돌’, blind는 ‘발’, deliberately는 ‘부러’ 등 토박이말로 풀이해놨다.

외국어를 쉽게 뜻이 통하고 자연스러운 우리말로 옮기는 일은 결국 우리의 정신을 바로 세우는 일이기도 하다. 치열한 언어의 사투를 벌이는 번역가들뿐만 아니라 영어를 배우는 중·고등학생들, 우리말글의 올바른 쓰임에 관심이 많은 일반인들이 적극 책을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1만7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