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4월 1일이면 미국의 대학 정시합격자가 발표된다.
미국에서는 명문대 몇 군데에 동시 합격했는지가 뉴스가 되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이맘 때면 한국인이 미국 명문대 몇 군데에 동시 합격했는지가 중요한 뉴스가 된다. 장학금 수령 사실을 두고 마치 최우수 입학인 것처럼 과장하기도 하고, 입학을 둘러싼 미담 기사가 지면을 장식한다.
올해도 역시 ‘하버드대 전액장학생 캐나다 한인남매’의 기사와 함께, 미국 명문대 8군데에 동시합격한 학생 기사, 그리고 자사고와 특목고의 미국대학 입학 실적 등이 보도됐다. 특히 한 학생의 경우 하버드대 뿐 아니라 예일, 다트머스, UCLA, 버클리, 옥스퍼드, 런던정경대, 서울대 등에 모두 합격했다는 데에 언론은 ‘놀랍다’며 집중조명하기도 했다.
축하한다. 같은 한국인으로서 자랑스럽게도 생각한다.
하지만 한번 따져보자.
아직도 이런 기사들이 뉴스가 되어야 하는가.
“개가 사람을 물면 뉴스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개를 물면 뉴스가 된다”는 말이 있다. 19세기 후반 뉴욕의 <SUN>지에서 유래한 말이다. 실제로 남자가 개를 무는 사례가 있었다. 하지만 여자가 개를 물었다는 기사는 거의 없었다. 1987년 11월 <LA타임스>는 남자가 개를 물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하지만 개가 먼저 남자를 물었다는 사실로 인해 그 기사의 가치는 조금 떨어졌다.
미국 유학생 세계 1위인 나라에서, 그리고 오로지 명문대를 선호하는 나라에서, 외국 대학 입학만을 목적으로 하는 외고, 특목고, 자사고를 운영하는 나라에서 더 이상 외국 명문대 합격소식은 뉴스의 가치를 잃어간다.
입시제도와 장학제도의 차이를 무시하는 것도 못된 습관이다. 미국 대학 등록금이 비싼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보다 훨씬 폭넓고 깊이 있는 장학제도를 운영한다는 사실쯤은 다들 알고 있다. 그리고 장학금 기준이 단지 성적만이 아니라는 사실도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그래서 장학금을 기준으로 한 기사가치 판단도 변경되어야 한다.
미국 명문대를 하나 합격하건 열 개 합격하건, 별 차이가 없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SAT가 만점 수준에 몇몇 조건만 갖추어지면 흔히 말하는 미국 명문대 어디든 입학을 환영한다. 우리는 정시모집 때 가, 나, 다군 세 군데만 입학원서를 넣을 수 있지만 미국은 수십 군데 심지어 마음만 먹으면 5백군데도 넣을 수 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최종합격자가 가려지기까지 몇 달이 걸리곤 한다. 앞 순번을 받은 사람이 등록을 하지 않으면 그 다음 후보자로 넘어가기 때문에 7월이 다 되어서야 신입생이 결정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런데 마치 여러 군데 합격하면 대단한 것처럼 보도하는 태도도 이제는 고쳐야 한다. 물론 어느 대학에서나 입학을 허가받고 환영한다는 건 그만큼 실력이 있고 입학사정관의 마음에 쏙 들었다는 의미겠지만, 그 자체가 입학제도의 차이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미국 명문대 입학을 다룬 언론 기사를 읽다 보면 도리어 미국 명문대 입학이 개인의 동기보다는 부모의 노력과 조건 때문에 사실상 선제적으로 결정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하는 결정론의 함정에 빠질 때가 많다. 물론 성적과 각종 대회 수상경력과 특기 및 적성 능력은 기본이다. 문제는 이들 미 명문대 입학생 대부분이 어린 시절 부모님을 따라 외국에서 수년동안 체류한 경험이 있는 아이들이라는 것이다. 자칫 그 학생들에게 누가 될성 싶어 염려스럽지만, 대부분 초중등 시절 유학경험이 있었다는 사실이 대단히 중요한 조건 중 하나였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만 관심이 있고 명문대 입학이 곧 남은 인생을 결정한다고 믿는 대한민국 특유의 사고방식이다. 명문대 입학이 그대로 명문 직장으로 이어지고, 학벌은 곧 우리 사회의 신분질서로 이어진다. 명문대 입학 이전에 명문고가 있고, 명문고 이전에 고소득 전문직이라는 이른바 ‘명문’ 부모가 있다. 근대 이후 해체된 신분제적 질서가 개인의 능력을 넘어 하나의 문벌 혹은 신분제 사회로 귀착되고 있다. 이 사회에서는 대학에 들어가서 무엇을 공부하고 어떤 생각을 갖고, 나중에 대학을 졸업한 다음 우리 사회와 국가에 어떤 기여를 하는가는 관심 밖이다.
▲ 대표적인 자사고 민족사관고 (오마이뉴스)
오늘의 미 명문대 입학생이 앞으로 10년 20년 뒤 우리 사회에 어떤 긍정적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는가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입학때까지만 사회적 관심사고 그 다음은 개인의 한 생애일뿐이다. 조선시대 과거 시험에 누가 합격했는지, 최근 우리 사회에서 누가 고시에 합격했는지 이런 식의 뉴스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작년 이맘 때쯤 우리에게 충격을 준 뉴스가 하나 있었다.
재미교포인 새뮤얼 김의 컬럼비아대 교육심리학 박사논문이 그것이다. 논문에 따르면 이른바 미국 명문대 한국인 유학생 중 중도 탈락자가 10명 중 4.4명에 달한다는 통계였다. 김 박사는 1985년부터 2007년까지 한국인들이 특별히 선호하는 하버드대 등 미국 14개 명문대에 입학한 한인 학생 1400명을 추적조사했다. 놀랍게도 이중 44%인 616명이 중퇴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 수치는 미국 학생들의 평균 중퇴율 34%보다 10%나 높은 것이며, 인도계 21.5%, 중국계 25%, 유대계 12.5% 중퇴율에 비해서도 거의 2-3배 높은 수치였다. 한국 최고의 수재들이 미국의 명문대에 입학하고도 적응하지 못하는 날카로운 현실을 보여주는 논문이었다.
가깝게는 입학 이후 적응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논문이었다. 하지만 보다 멀게는 우리가 입학과 재학, 그리고 졸업 이후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고, 어떠한 긍정적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가를 교육-사회학적 차원에서 살펴보아야 할 사회적 의제를 제시한 논문이었다.
이른바 SKY라는 명문대 입학이 한 인간의 평생을 좌우하는 사회가 바로 한국 사회다. 우리는 그 눈으로 누가, 몇 명이서, 미국 명문대를 입학하게 됐는가를 수치로만 따지고 어떻게 들어갔는지만을 확인하며 보도한다. 더 이상 이런 버릇은 고쳐야 한다.
개가 사람을 무는 일은 뉴스가 아니다. 미국 명문대 입학이 더 이상 그렇다. 사람이 개를 물어도 사안에 따라 뉴스가 된다. 구체적인 정황을 따져보아야 한다. 그리고 사람이 개를 물어 그 이후 사건이 어떻게 진행됐는지도 따져볼 필요가 있다. 뉴스는 그저 늘 새로운 것만을 찾는 일은 아니다. 왜 새로운지, 왜 더 이상 새롭지 않을 수 있는지, 그리고 계속 새로울 수 있는지 등도 따져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