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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장공모제에서 시장주의자가 승리하길...

리첫 2009. 5. 12. 12:28

다음 중 자격증이 필요한 직책은? ①시장 ②사장 ③총장 ④학장 ⑤교장. 정답은 ⑤교장이다. 나는 왜 유독 교장만은 자격증을 요구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교육에 대한 능력과 마인드를 주변에서 인정받은 사람이 교장이 되도록 하면 되지, 왜 관료적인 승진 트랙을 따라서 차곡차곡 점수를 쌓아간 사람만이 교장이 될 수 있을까? 더구나 교원 승진제도(근무평정)에서 교장이 점수를 매기는 평가항목을 보면 ‘교육관이 얼마나 투철한가?’와 같은 주관적이기 짝이 없는 것들이어서, 현실적으로 교장에게 잘 보이지 않고서는 승진이 불가능하다.

 

이삼십년간 ‘위’만 보고 승진궤도를 밟아 올라가 교장이 된 사람이 갑자기 ‘아래’에 있는 학생이나 학부모에게 눈높이를 제대로 맞출 가능성은 거의 없다. 대한민국 교장들 특유의 케케묵은 답답함의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희한한 승진제도가 계속 유지된 것은 사실 우리나라 교육을 좌우해온 핵심세력이 바로 ‘관료파’이고, 관료파의 권력을 유지하는 두 개의 핵심 기둥이 교육과정 편성권과 승진제도이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 관료파에 도전하는 ‘미국파’가 나타났다. 이들은 미국 공화당에서 추진했던, 시장원리에 입각한 신자유주의적 교육개혁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있다. 미국파의 핵심인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차관과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 정두언 한나라당 의원 등은 모두 경제학 전공자로서, 관료파의 기득권에 포섭된 적이 없다. 이들의 눈에 기존의 교장 승진·임용제도가 곱게 보일 리 없다. 특히 미국파의 수장인 이주호 차관의 지론이 바로 ‘교장공모제’를 확대하는 것이다.

 

교장공모제는 일반적인 승진 경로를 거치지 않고 바로 교장이 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교장공모제에는 초빙형, 개방형, 내부형 세 가지가 있는데, 그중 ‘내부형’은 교장 자격증이 없는 일반 교사도 교장이 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관료파의 아성인 교총이 내부형에 대하여 ‘무자격 교장’을 양산한다며 격렬한 반감을 보여온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실제로 향후 교장공모제에서 내부형을 제외할 조짐을 보였다.

 

이런 움직임에 제동을 건 것이 미국파다. 1월에 이주호 차관이 교육과학기술부에 부임하고 나서, 진작 나왔어야 마땅한 교장공모제 개선안 발표가 계속 미뤄지고 있다. 그 와중에 5월1일 교육과학기술부는 2010년까지 전국 초·중·고교의 20%에 해당하는 2500개교를 자율학교로 지정하겠다고 발표했다. 자율학교로 지정되면 교장공모제 도입이 가능하다. 그런데 보도자료에는 이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전혀 없다. 관료파와 미국파 사이의 내부 다툼이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음을 짐작게 하는 대목이다. 최근 학원 심야교습 규제 등을 둘러싼 갈등의 이면에도 실은 관료파와 미국파 간의 치열한 견제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미국파의 지원군이 나타났다. 김상곤 신임 경기도교육감이 취임 일성으로 교장공모제(내부형)의 확대를 공언한 것이다. 관료주의 혁파를 위해 시장주의자와 진보주의자가 손을 잡는 듯한 형국이다. 사실 미국파의 정책이 교육문제를 해결하는 데 별로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것은 명확하다. 일제고사는 이미 파탄 났고, 자사고와 교원평가는 원하는 효과(교육 다양화 및 학교 책무성)를 얻지 못할 것이며, 입학사정관제는 도입 취지는 긍정적이지만 예측되는 결말은 비관적이다. 하지만 관료주의를 해체하는 데 시장주의만큼 강력한 무기도 별로 없다. 교장공모제를 둘러싼 다툼에서만은 시장주의자가 승리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범 교육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