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영어, 외우면 떨어진다…묻고 따져라

리첫 2009. 6. 8. 07:22

영어, 외우면 떨어진다…묻고 따져라
학생들, 발음 듣고 질문하며 정답 추론
뜻·어원·예문등 배경지식과 사고력 요구
단어 통째로 암기하는 한국과 ‘천양지차’
한겨레 김청연 기자

» 영어, 외우면 떨어진다…묻고 따져라
‘미국 스펠링비’ 대회 참관기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 소녀가 무대 앞으로 나왔다. 출제자가 단어를 말했다. “Laodicean(레이아더시언)” 이어 소녀의 질문과 출제자의 답변이 오가기 시작했다. “Laodicean. Can I have the definition?(레이아더시언. 정의를 알 수 있을까요?)” “Laodicean. Lukewarm or indifferent in religion or politics.(레이아더시언. 종교나 정치에 냉담하거나 무관심한 걸 말합니다.)” “Can I have a language of origin?(기원 언어는요?)” “It consists of a greek geographical name that went into Latin, plus English combining form.(그리스 지명이 라틴으로 건너가서 영어와 결합된 단어입니다.)”

 

1분이 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대회장의 관중석에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답변을 들은 소녀는 침착하게 왼손바닥에 스펠링을 적어봤다. 그리고 또박또박 천천히 단어의 스펠링을 말하기 시작했다. “l-a-o-d-i-c-e-a-n. laodicean!” 소녀가 마지막 스펠링을 발음하는 순간 쥐 죽은 듯 고요했던 대회장은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 지난 5월28일(현지시각) 미국 수도 워싱턴 그랜드 하이엇 호텔에서 열린 제82회 스크립스 내셔널 스펠링비(Scripps National Spelling Bee) 결승전에서 우승자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우승 트로피를 거머쥔 이 학생은 캔자스주 올레이서에 사는 카비아 시바샹카르(13·캘리포니아 트레일중 8학년)였다.

 

스펠링비는 출제자의 단어 발음을 듣고 철자를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맞히는 경기로 미국에선 일상적인 언어 게임으로 알려져 있다.

 

얼핏 ‘받아쓰기’를 연상하게 되지만 현장에서 본 스펠링비는 결코 단순한 게임이 아니었다. 카비아를 비롯해 결승에 진출한 학생들이 단어 철자를 맞히는 데선 공통된 법칙이 보였다. 학생들은 출제자의 발음과 똑같이 단어를 발음해보고 자신의 발음이 정확한지를 확인했다. 이어 단어의 정의를 묻는 질문을 출제자에게 던졌다. 대회에선 단어 정의와 함께 품사·어원·예문 등을 물을 수 있다. 단어의 발음 규칙을 바탕으로 배경 지식과 정보를 물은 뒤 추리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이 대회가 언어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와 함께 사고력, 추론 능력 등을 필요로 한다는 걸 보여준다. 대회 총괄자이자 81년 대회 우승자인 페이지 킴블은 “ “기억력이 좋아야 최고의 스펠러가 되는 건 아니다”라며 “85% 이상의 단어가 여러 나라에서 들어온 영어의 특성 때문에 다양한 나라의 언어·역사·풍습 등을 알고, 이를 바탕으로 유추하는 능력을 지닌 학생들이 스펠러가 된다”고 강조했다.

 

» 스펠링비는 언어능력과 이해력, 사고력 등을 요구하는 창의적 교육현장이자 전세계 학생들이 언어를 매개로 우정을 나누는 문화축제. 대회에서 한국계 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왼쪽에서 세번째는 우리나라 대표로 출전한 서지원양, 여섯번째는 한국계 에스더 박양.

흥미로운 건 스펠링비 방식이 미국 학교의 어휘 교육 방법과 같다는 점이다. 대회 심사위원 가운데 한 명인 에드 로 교수(덴버 메트로폴리탄 주립대 영어학)는 “미국 학생들은 단순히 철자의 순서를 암기하며 어휘를 접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이 대회 방식처럼 발음을 듣고 입으로 말해본 뒤 뜻·어원·예문 등을 가지고 단어를 추측하는 식으로 공부한다”고 설명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발음기호와 단어의 뜻부터 외웠던 한국식 영어공부법을 돌아보게 하는 대목이다.

 

우승자 카비아는 정석대로 영어 학습을 하고 스펠링비를 준비했다. 정답을 맞힌 과정을 묻는 질문에 그는 “답변을 들으며 책에서 봤던 어원을 떠올렸다”고 했다. “평소 단어 암기는 안 한다. 어근을 먼저 공부하며 발음을 익히고 써봤다. 그리고 단어가 어떻게 활용되는지를 살펴봤고, 단어의 어원이나 유래 등에 관한 정보를 책으로 읽어 본다”고도 덧붙였다.

 

출제자의 발음을 곱씹어보고 질문을 통해 가능성 있는 답을 추론하는 모습은 대회의 진풍경이었다. 카비아처럼 손바닥에 글자를 적는 학생도 있었지만, 쉴새 없이 눈을 굴리며 단어를 추측하는 학생도 있었다. 홈스쿨러 베로니카 엘 페니(11·캐나다 온타리오주 해밀턴 거주 5학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몇 초 동안 움직이지 않았던 것에 대해 “사전에서 예문과 설명을 봤던 단어인지 생각해봤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결승전이 있던 날, 워싱턴 시내의 아침은 일찌감치 도착한 <이에스피엔>(ESPN), <에이비시>(ABC) 등 방송사 카메라 차량과 취재진으로 북적거렸다. 82년 역사를 자랑하는 스펠링비 생중계는 시청자가 900만 명에 이를 만큼 인기가 높다.

 

올해 대회엔 13개국 293명의 학생이 지역별 또는 국가별 대표로 뽑혀 출전했다. 지난해 아시아 최초로 한국이 출전한 데 이어 올해는 중국이 처음 출전해 아시아에서도 스펠링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대회 이틀째 날 호텔 로비에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해외 유학, 연수 경험 등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자기주도적으로 영어 공부를 하고 미국 결선까지 온 한국대표 서지원(13·고양 한내초 6년)양이었다. 서양의 어머니 정은성씨는 딸이 그새 사귄 다른 나라 친구와 모의 스펠링비를 했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렇게 다른 피부색을 가진 학생들이 모여 철자 맞히기 게임을 즐기면서 대회를 ‘공부’가 아니라 ‘놀이’로 즐기고 친분을 다지는 모습은 대회장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탈락을 했어도 대회장을 떠나지 않고 남은 학생을 응원하는 학생들의 모습에서 올림픽에서나 볼 법한 건강한 경쟁의식도 엿보였다.

 

한국 대표 서양이 맞힌 단어는 비교하거나 비길 데가 없다는 뜻의 ‘incomparable(인컴퍼러블)’. 비록 준결승 문턱에서 그쳤지만 서양의 어머니 정은성씨는 2년째 참가한 스펠링비를 통해 느낀 게 많다. 그는 “발음 공부를 기본으로 했고, 여기에 더해 평소 다양한 책을 많이 읽혔다”며 “지원이가 스펠링을 맞힐 수 있었던 건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여러 가지 종합적 사고 능력을 갖췄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는 “단어 암기 위주의 학습은 옛말이고, 알파벳 음성구조를 안 다음 자기주도적으로 책을 읽고 배경 지식을 넓혀가는 학습이 영어에서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워싱턴/글·사진 김청연 기자 carax3@hanedu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