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끝까지 부정선거 데모로 싸우겠습니다.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잘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의 모든 학우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간 것입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시간이 없는 관계상 이만 그치겠습니다.
이 편지를 쓴 사람은 누구일까? 국가와 민족을 위해 생명을 바치겠다는 이 학생은 대학생도, 고등학생도 아닌 15살의 한 여중생(진영숙양, 당시 한성여중 2)이었다. 민주 항쟁기를 겪었던 분들은 요즘 학생들은 정치의식이 없다고들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이다.
우리나라는 엄연히 대통령을 선거로 뽑는 나라이고, 나라를 지배하는 최고법이라는 헌법에서는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민주화가 이루어진 우리 사회에서는 더는 중학교 2학년이 목숨을 걸고 시위를 해야 할 일도, 언제 계엄군이 공세를 펼지 몰라 찬 주먹밥을 씹으며 초조해야 할 일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치’에 관심을 가지기에 우리의 생활은 지나치게 바쁘다.
학생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는 것은 대한민국에서 그렇게 장려되는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의 중학생, 고등학생이라면 ‘입시’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서 달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 길 위에는 종종 남이 걸려 넘어질 수 있는 돌멩이도 있지만, 누구도 그것을 치우지 않는다. 그 길 위에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꽃들도 있지만, 누구도 그것에 한눈팔지 않는다. 그렇게 여기저기 신경을 쓰다보면 누군가가 나를 앞질러 갈 것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제16대 노무현 대통령의 영결식 날, 영결식을 생중계하는 텔레비전을 틀어놓은 그 앞에서 몇몇 학생들은 자습을 하고 있었다. 그가 왜 죽음을 선택했는지, 그는 죽음으로써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그리고 그의 죽음을 통해 우리가 느껴야 할 것,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치는 그렇게 우리가 섣부르게 경시하고 넘어가도 되는 것이 아니다. 정치는 어떻게 해야 우리가 가는 이 길 위에 놓인 바위를 잘 치울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다. 우리 삶의 가장 가까운 곳에 생기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 그것이 정치이다. 따라서 정치는 우리와 유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유리되어서도 안 된다.
정치에 관심을 갖자는 것은 어려운 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입시 공부를 떠나서 우리 세상에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지, 이 사건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평가를 내려야 하는지, 또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한번쯤은 고민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청소년들은 대한민국의 내일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옳은 일인지에 대한 고민, 그리고 그것을 통해 옳은 것을 실천하려는 힘을 기르는 것은 분명히 우리의 삶을, 그리고 우리의 사회를 더욱 정의롭게 바꿔나가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전효빈/고등학생, 아하!한겨레 학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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