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 1 : 엄마, 이 단어 좀 읽어봐.
엄마 : 야, 너 이거 못 읽어? 너 바보 아냐?
형 : 야, 너 대체 할 줄 아는 게 뭐니?
얼마전 같이 공부하는 모임 선생님이 해 준 이야기이다. 엄마가 중학교 선생님인데, 중학교 1학년 아이가 영어단어를 몰라서 형이랑 같이 면박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 선생님은 사교육 없이도 학교 교육을 통해 아이가 잘 자랄 것이라고 믿고 '학원'에 보내지 않았다. 아이는 다른 과목은 잘하는데 영어만 유독 떨어져 스트레스가 크다고 했다.
이 말은 들은 모임 선생님은 이렇게 이야기해 주었다.
"아니, 샘 초등에서 그거(음철법, Phonics) 안가르쳐요. 그래서 모르는 건데 애한테 그러면 어떡해요? 당장 애한테 그거부터 가르쳐줘야 해요. 사교육 안할 거면 직접 가르쳐주세요."
초등영어교육과정을 잘 알고 있는 선생님이 이렇게 대답했더니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것도 모르고 아이만 닦달했다고 아이한테 미안하다고 했단다.
450개를 그냥 듣고 외워?
초등학교에서 4년 동안이나 영어를 배웠으니 당연히 영어 단어 정도는 읽고 쓸 줄 알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는데, 절대 아니다. 영어는 대표적인 소리 문자인데, 단어 읽는 법을 배우지 않으니까 눈 뜬 장님이 되는 것이다. 4년 간 450여 개의 단어를 배우도록 교육과정이 설계되어 있지만, 읽는 법은 가르치지 않는다. 그냥 듣고 외울 뿐이다. 아이들에게는 마치 450개의 그림이나 기호를 외우라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우리가 한글 원리를 배우기 전에 글자를 통째로 외운 것처럼.
학교에서 선생님이랑 열심히 게임하고 듣고 따라하고 집에 와서 영어 시디를 들으며 복습한다 해도 450개 단어를 그냥 외운다는 건 한계가 있다. 우리나라와 같은 외국어로서의 영어 환경(EFL)에서 읽기가 막히면 그렇게 강조하는 말하기, 듣기 실력이 느는데 한계가 있다. 읽기가 안되는데 쓰기는 더 말해 뭣하랴!
이렇게 공부한 아이들이 중학교에 가면 중학교 교사들은 당연히 이런 걸 배운 줄 알고 진도를 나간다. 영어 단어조차 제대로 읽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초등학교에서 뭘 배웠느냐고 다그치기까지 한단다. 우리가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배웠던 알파벳과 발음기호에 대한 선명한 기억이 그런 오해를 부추기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국가 교육과정만 믿고 학교에서만 영어 공부를 한 아이들은 이렇게 영원한 영어 부진아가 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요."
초기에는 많은 선생님들이 경험을 살려 영어 단어 발음을 한글로 써주고 테이프나 CD로만 나오는 영어 문장을 프린트해서 나눠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 장학사에게 영어교육과정을 위배하는 거라고 핀잔을 들었다고 한다. 연구학교 보고회 같은 데에서도 선생님들이 외국어인데 읽는 것도 모르고 어떻게 하느냐고 물어봐도 그냥 교육과정대로 게임하고 CD들려주라고 하였다. 그것도 모자라 본토 발음이 중요하다고 원어민 데려다 앵무새처럼 따라만 하게 했다. 교육과정대로만 가르치면 이렇게 부진아가 되는데 그 동안 누구도 이런 문제를 이야기해주지 않고 심지어 교사가 이걸 해결해보려고 해도 도리어 막았다고 하니 기가 막힐 따름이다.
영어책은 그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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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시행되는 7차 초등영어교육과정 중 읽기 영역에 대한 목표를 확인해보자. 3학년에는 읽기 교육 영역이 들어와 있지 않다. 일주일에 한 시간 재밌는 노래와 놀이를 하며 보내는 것이다. 3학년 영어 교과서는 온갖 그림과 사진으로 가득 차 있으며 단원명이나 차시 흐름이 영문으로 안내되어 있다. 배운 단어나 표현들이 하나도 제시되어 있지 않은 영어 교과서를 보면서 집필진들은 그림만 봐도 배운 표현이 튀어나올 수 있기를 기대한 모양이지만 화려한 모양과 달리 영어 교과서는 수업 시간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림책 취급을 받고 있다.
읽기 따로 쓰기 따로, 여기가 미국이야?
4학년 읽기 시간에는 알파벳 읽기를 배운다. 교육과정상 알파벳 읽기를 배우면서 쓰기를 가르치는 것은 틀린 것(알파벳 쓰기는 5학년 때 한 단원에 5개씩 배운다)이다. '알파벳을 읽기만 하고 쓰기는 5학년 때 가르치라니, 이건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우리가 영어를 배워 온 기억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교육과정 개발자들은 영어 학습의 신화처럼 떠받드는 조기외국어교육 이론에서 이런 방식을 취해온 것 같다. 음성언어에 충분히 노출시키고 난 후에 문자를 읽기로 접하고, 그 다음에 쓰기로 넘어가는 것이다. 바로 우리들의 모국어 학습과정과 동일한 과정이다. 그런데 우리는 미국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착각이 교육과정에 엄청난 오류를 만들어내고 있다.
일주일에 한 시간, 연간 시수로 하면 34시간, 1시수 40분임을 감안하면 22.6시간 노출이다. 이 정도만으로 음성언어에 충분히 노출되었으니 이제 문자 언어도 22.6시간 노출시키고, 문자를 읽어라 하는 것이다(사실, 22.6시간 중에 문자 읽기에 할애된 시간은 1/10도 안되며, 연간 34시간이라는 시수가 현장에서 정확하게 지켜지기도 어렵다). 이런 말도 안되는 착각이 국가 영어 교육과정으로 건재하는 현실에는 이런 함의가 깔려 있을지도 모른다. 초등학교에 영어가 도입된 이상 대다수 국민들이 영어 사교육에 올인할 것이니(아니 이미 올인하고 있으니) 노출시간은 그렇게 확보하면 된다!
시간만 늘리만 만사형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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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학년 1학기 '읽어보자(Let's read)' 시간에 대부분 단순 알파벳 읽기 학습이 진행된다. 읽기 학습이 제대로 이루어지기에는 시간도 부족하지만 제시되는 교수학습 방법이라는 것이 알파벳 문자 하나가 떠오르면 무슨 문자인지 알아맞히고, 대문자와 소문자 연결해서 선 긋기와 같이 아주 단순한 것 뿐이라는 점이다. 1단원 에이(A)부터 엠(M)까지, 2단원 엔(N)부터 지(Z)까지 대문자와 소문자를 연결하게 하고, 3단원 26개 전체를 차례대로 선으로 연결하게 하는 활동이다. 그리고 이제 이런 단어를 읽으란다. 세븐(seven), 텐(ten), 베드(bed), 런치(lunch) 알파벳 읽기를 배우면서 그 문자가 어떤 음가를 지니는지 전혀 가르치지도 않고 그저 그 문자의 이름만 주야장천 외게 해 놓고, 해당 단원의 말하기 듣기 시간에 배웠던 표현에 나온 단어를 문자 읽기라는 측면에서 아무런 계열성 없이 뽑아서 제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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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정은 이렇게 엉터리로 만들어 놓고 진단평가를 실시해서 그 진단에 못미치는 아이들은 '부진아'로 낙인찍는단다. 영어 격차가 심하고 사교육의 원흉이라는 원성이 빗발치니 수업 시수가 부족해서 그러니 수업시수를 늘려달라고 아우성이다.
한국 사회의 교육 현실, 한국인이 어떻게 영어라는 외국어를 배우게 되는지 학습 과정에 대한 기본 연구도 없이, 외국의 이론만 들이대며 영어 시간 늘려야 한다는 교육과학기술부나 이에 편승하는 영어교육 강화론자들은 마땅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