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영어교육 망치는 주범

리첫 2009. 9. 27. 19:05

그 쉬운 in, on, under를 왜 못 읽을까?

 

Now, Let's play games.

This game is whispering(손을 모아 귀에 대고 속삭이는 듯한 동작을 보이면서 소리를 작에 여러 번 반복) whispering, whispering game.

 

초등학교의 영어 교실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한 단원을 4차시로 나누어 공부하게 되는데, 1~2차시에는 듣고 이해하는 활동 중심으로 이루어져 영어 대화를 듣고 주요 문장을 말해보는 연습을 하고, 이를 바탕으로 놀이를 하거나 챈트를 한다.

 

5학년 1학기, 3단원, 2차시.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묻고, 어디에 있는지 전치사(in, on, under)에 대해 학습하는 시간이다. 상자, 필통, 바구니, 책, 지우개, 연필 등을 미리 준비해서 세 가지 전치사를 학습하고 놀이를 시작한다. 물론, 다 영어로 진행하며, 아이들 주의를 끌기 위해서 실물을 가지고 바구니, 상자, 필통 등등에 집어넣었다가 올려 두었다가 아래 내려놓았다가 하면서 수십 번 문장을 말하고 따라해 보게 한다.

 

이제 놀이 시작이다. 남녀 두 편으로 갈라 두 줄로 서게 한다. 그리고 칠판에는 앞서 배운 전치사 단어가 쓰인 그림 카드 세 장을 칠판 위에 붙여 놓는다. 앞을 보고 서 있는 아이들이 Where's my pen? 하고 물으면 교사는 맨 뒤에 서 있는 아이 두 명에게 'It's in (on, under) the box.' 라고 귓속말을 해 준다. 그러면 그 말을 들은 아이가 자기 편 아이 귀에 전해주고, 그렇게 앞으로 전달해 맨 앞의 아이가 칠판에 있는 그림 단어 카드 중 맞는 카드를 집는 놀이이다.

 

  
▲ 말전하기 놀이를 해 봅시다. 교육과정 상에는 2단원 요일과 시간표를 묻고 답하는 내용에 이 놀이를 배치해 놓았다. 그렇지만 무슨 요일에 어떤 과목이 들었다고 문장을 유창하게 전달하는 것이 정말 쉽지 않았다.(I have English class on Monday) 놀이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 한희정
초등영어

똑같은 놀이를 1년 전에 강남의 모 초등학교에서 할 때는 아무런 무리가 없었는데, 강북의 모 초등학교에서 하니 놀이가 진행되지 않았다. 가다가 끊기고, 무슨 말인지 모르고, 전달을 못하고, 그림과 글씨를 보며 단어를 읽지 못했다. 결국 문장 수준에서는 전달하기가 안돼서 단어 수준으로 전달하는 것으로 놀이를 바꾸어서 진행했다.

 

바로 이어진 다음 반 수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설명을 하는데, 문장 연습을 하는데 더 공을 들였지만 마찬가지였다. 9개 반, 똑같은 수업을 하는데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서 심각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왜? 안될까? 그 쉬운 'in, on, under'를 왜 못 읽을까? (사실, 이 게임은 2단원에서 하도록 되어 있지만 아이들이 요일을 영어로 읽는 것을 너무 힘들어해서 쉬운 단어가 있는 단원으로 바꿔서 해 본 것이었다.) 5년 전, 처음으로 영어 교과 전담을 맡았을 때 있었던 일이다.

 

"진짜, 파닉스 안가르쳐요? 6학년 때도?"

 

지난 기사에서 초등 영어 교육과정에서 음철법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무작정 읽기를 강요한다고 하니, 초등교육경력 20년 넘은 선생님이 이렇게 물어보셨다.

 

그렇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답답한 것은 국가의 교육과정을 믿고 정부의 현란한 수사법이 동원된 교육 정책을 믿고 아이들을 사교육 시장을 내몰지 않은 '의식'있는 부모 또는 내몰 만한 여력이 안되는 '돈'없는 부모들뿐이다. 나머지, 내 아이의 미래를 '영어 학원'에 위탁한 대다수 국민들의 맞장구가 들려온다. '그래, 내 그럴 줄 알았어. 그러니까 빚을 내서라도 보내야지.'

 

  
▲ 4~5학년 읽기 단어 읽기 영역 학습에서 제시되고 있는 문자와 단어를 정리해 보았다. 6학년 1학기부터는 문장 읽기기 때문에 따로 정리하지 않았다. 겨우 읽기 시간에 이 정도의 단어를 다루고 나서 6학년이 되면 문장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단다.
ⓒ 한희정
초등영어

 

초등학교 4~5학년 읽기 영역에서 다루는 단어와 문자를 표로 정리해 봤다. 초등학교에서 다루는 단어는 약 450개라고 하지만 읽기 영역에서 읽어야 할 단어로 제시되는 것만 뽑아 놓은 것이다. 나열된 단어를 쭉 읽어가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하나, 이렇게 쉬운 단어도 못 읽어? 둘, 도대체 뭘 기준으로 선정한 거지?

 

'이렇게 쉬운 단어도 못 읽어?'

 

누구나 쉽게 이렇게 반응한다. '이렇게 쉬운 걸 너는 왜 모르니?' 그러나 영어는 정말 특별한 교과이다. 우리말이 아니라 외국어이기 때문이다. '영어 권력'이라는 것을 굳이 들먹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외국어인 영어를 조금 할 줄 안다는 것은 아이들에게 엄청난 권력으로 작동한다. 교실 현장이든, 정책 수립 현장이든, 영어 학습 이론 연구의 현장이든, 영어 학습에 어려움을 느끼는 아이들에게 내려가서 왜 어려움을 느끼는지 찬찬히 살펴볼 틈을 주지 않는다. 시간과 돈을 들이붓고, 무작정 흥겨운 노래와 놀이에 아이들을 던져놓는다. 대부분의 현장에서 의사소통능력을 키워주겠다는 외국어 교육이 불통의 현장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뭘 기준으로 선정한 거지?

 

지난 기사에서 읽기 단어가 '내용 계열성' 중심으로 제시되면서 '읽기 교육'을 경시한다고 지적했듯이, 해당 단원의 내용에 따라 오락가락이다. 4학년 4단원 bed와 5학년 6단원 bed처럼 같은 단어가 두 번 제시되기도 한다. 5학년 2단원은 요일 읽기다. 4학년 때 알파벳 읽고 쉬운 단어 그림보고 말하는(읽는 것이 아닌) 수준이었던 아이들에게 문자만 나열된 요일을 읽으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요일은 그림을 보고 연상하기조차 어렵다.

 

  
▲ 요일 단어 읽기 회화에서 기본이지만, 파닉스나 읽기 학습이 제대로 안된 요일 단어를 읽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문화적인 차이 때문에 무작정 외는 수 밖에 없는데 단어 읽기는 더 어렵지 않나? 그런데도 이렇게 간단히 제시되고 다 함께 한 번 읽어보는 것으로 끝난다.
ⓒ 한희정
초등영어

무슨 기준으로 읽기 단어를 선정했나? 기준? 없다. 안타깝지만 그렇게 볼 수밖에 없다. 기준이 있다면 이렇게 난이도도, 내용도, 소리도 들쭉날쭉 제멋대로 선정할 수 있겠는가? 같은 단어가 두 번이나 나올 수 있는 것인가? 영어교육과정 심의회에 참여했던 선생님조차 그 기준을 알 수 없다고 하는 걸 보니 없는 게 사실인 것 같다.

 

  
▲ 5~6학년 쓰기 영역에서 다루는 단어 5학년 1학기부터 알파벳 쓰기를 시작해서 6학년 1학기까지 단어 쓰기를 공부하고, 6학년 2학기에는 문장 쓰기를 해야 한다. 이런 교육과정 편제에 과거 우리가 공부하던 방식이 아니고 어떤 방법으로 접근이 가능한 것인지 정말 궁금하다. 이 교육과정을 개발하고 집필하신 분들이 직접 이런 교육과정과 교과서를 가지고 30명, 천차만별의 아이들 데리고 수업을 해 보셨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 한희정
초등영어

 

그렇다면 쓰기 교육은 어떤가? 알파벳 쓰기가 처음 도입되는 5학년 1학기부터 6학년 1학기까지 쓰기용 단어로 제시된 것을 정리해 보았다. (6학년 2학기는 단어가 아닌 문장 쓰기여서 생략했다.) 짚어지는 문제는 읽기 영역과 매한가지다.

 

5학년 6단원에서는 cat, cup, candy 를 다루어 'C'의 음가를 이해할 수 있게 했나 싶지만, 바로 다음 단원에서는 nose, mouth, face 가 나온다. 먹지 혹은 깜지 써가면서 무턱대고 단어 스펠링을 쓰면서 외워가던 교육을 구시대의 교육이라고 한다면 뭔가 새로운 대안 제시가 필요한 것은 아닌가? 아니면, 한국인에게 이보다 좋은 방법이 또 있기는 한가? 읽기 쓰기 없이 영어 교육이 가능한가?

 

  
▲ 5학년 3단원 쓰기 부분 교과서의 5학년 3단원 쓰기 부분이다. 알파벳 한 번씩 써보고, 대문자 소문자 연결해보는 것으로 끝이다. 이렇게 5개 단원이 끝나면 바로 단어 쓰기에 들어간다.
ⓒ 한희정
초등영어

 

이런 엉터리 교육과정을 만들어 놓고, 일제고사로 아이들을 평가한단다. 이런 엉터리 교육과정을 만들어 놓더니, 내년부터 무작정 영어 수업 시간을 늘린단다. 왜 안되는지, 사교육 없이는 왜 부진아가 되는지 어떤 반성과 연구도 없이 그냥 갖다 쏟아 붓는 격이다. 온통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시간만 늘리면 만사형통인 것처럼 선전을 하고 있다. 정상적인 경로라면 영어수업시간을 늘리는 게 아니라 문제점부터 파악해서 사과하고, 우리 나라 아이들에게 맞는 영어교육 방법부터 제대로 찾아내야 하지 않나? 정부는, 교육부 선전만 믿고 아이들 영어교육을 맡긴 학부모들에게 손해배상은 못해주더라도 도의적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닌가?

 

어떻게 해야 하나?

 

이미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영어 교육 열풍을 잠재울 수 있는 건 '정부' 밖에 없다. '영어 권력'을 깔끔하게 인정하고 그 권력을 고루 나누기 위한 대안을 모색하는 길 밖에 없다. 영어 권력을 고루 나누려면 초등학교 3학년부터 영어를 가르쳐서는 안된다. 더 늦춰야 한다. 이제 막 타자, 세상, 죽음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하는 3학년 아이들은 우리말 공부로 그 시기를 건강하게 보내야 한다. 학자들이 인정하듯이 초등학교 3학년은 조기 영어 교육의 적기가 아니다.

 

  
▲ 초등 영어 교육을 책임지겠다는 홍보 사이트 실제로 들어가서 내용을 살펴보면 어떻게 책임을 지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동안 지적했던 문제점들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그저 시간 늘리고, 원어민 강사 데려다 쓰고, 영어 교실 만들고 하는 물량 공세로 끝인 격이다.
ⓒ 한희정
초등영어

 

그럼에도 현 정부는 '영어 권력'을 나눌 생각보다는, 독점하고 키워 줄 궁리만 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심지어 미래형교육과정(2009개정교육과정)에서는 3학년부터 4시간씩 늘리려 하고 연구진들은 초등 1학년부터 영어를 가르쳐야 한다고 대놓고 이야기하고 다닌단다. 지금 같은 구조에서는 영어수업시간이 늘어날수록 학습양은 많아지고 아이들의 절망은 더 깊어지며 학부모들의 영어사교육 부담은 더 커질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제 학부모가 나서서 이 무책임한 영어교육만능주의의 고리를 끊어야 할 때가 아닐까?

덧붙이는 글 | 저는 초등교육과정연구모임 연구원입니다. 모임 선생님들이 영어와 다른 교과들의 문제를 연속으로 내보낼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