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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록 문제 풀면 수학 실력 늘까

리첫 2009. 9. 29. 14:08

죽도록 문제 풀면 수학 실력 늘까
‘원리로부터 추론’하는 과정을 생략하는 문제풀이 중심의 수학공부가 습관이 된 초·중등학생은 고등수학을 잘할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진다.
[106호] 2009년 09월 21일 (월) 11:07:01 이범 (교육 평론가)
‘엄마표 영어’는 있지만 ‘엄마표 수학’은 없다. 대다수 엄마들이 학창시절 배웠던 수학에 대하여 ‘쓰라린 추억’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수학 좀 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곧잘 ‘심화 수학 문제를 풀어야 한다’ ‘경시대회에 도전해야 한다’는 조언을 듣는데, 수학에 대한 기억이라고는 ‘쓰라린 추억’밖에 없는 엄마로서는 제대로 판단하기 어렵다.

수학 경시대회 가운데 과학고 입시에서 쳐주는 것은 ‘수학 올림피아드’밖에 없다. 내년부터 과학고 선발이 입학사정관제로 바뀐다고 하지만, 올림피아드 입상 실적은 입학사정관의 눈에 확 띌 만한 중요한 ‘스펙’이므로 여전히 상당한 구실을 하게 될 전망이다. 과학 과목 올림피아드의 경우 중1 무렵부터 준비를 시작한 학생이 전국대회에서 입상하는 경우를 종종 보지만, 수학은 늦어도 초등학교 4~5학년에 시작해야 한다. 그만큼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이다.

심화·경시 수학 중심 공부가 ‘허당’인 까닭

   
얼마나 해야 할까? ‘죽도록’ 해야 한다. 농담이 아니다. 지금도 대치동에서 많은 학생이 ‘월화수목금금금’ 늦은 밤까지 경시 수학학원을 다닌다. 죽도록 한다고 해서 다 입상하는 것도 아니다. 상당한 재능을 타고나야 한다. 수학을 고도로 잘하는 것은 피아노를 고도로 잘 치는 것과 비슷해서, 타고난 재능을 요구한다. 결국 ‘재능’+‘죽도록’을 갖추지 못한 나머지는? 들러리다.

‘들러리’라는 말에 항변이 있을 것이다. 경시대회에서 입상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경시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심화 문제를 많이 풀다보면 고등수학을 위한 기초체력이 길러지지 않겠냐는 주장이다. 하지만 초등학교와 중학교 무렵에 많이 푼 심화 문제가 고등수학을 잘하는 기초가 될까? 중학생이 흔히 푸는 고난도 문제집은 대개 일본 수학책을 번역한 것이다. 일본식 고난도 문제는 ‘꼬아놓은’ 것이 많고, 어려운 문제일수록 풀이 과정이 길다. 그런데 수능 수리영역 문제는 서구식이어서 ‘꼬아놓은’ 문제가 별로 없고, 오답률이 높은데 풀이 과정은 두 줄 정도에 불과한 경우도 많다. 수능 수학에서 어려운 문제는 고등학교 때 처음 배운 수학적 개념이나 방법에 대한 본질적 통찰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적분 응용문제 가운데 어려운 것은 적분의 기초 이론(구분구적법 등)부터 따져봐야 하는 식이다. 일본식 심화 수학 문제에 도전할 여력이 있다면, 차라리 고등수학의 선행학습을 차근차근 해가는 게 낫다.

   
‘수학공부’를 ‘문제풀이 연습’과 등치해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에 죽도록 문제를 풀도록 하는 것은 오히려 고등수학을 잘하는 능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 가장 경제적인 수학공부는 원리로부터 추론하는 과정을 거쳐 여러 유형의 문제들이 해결됨을 이해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중3 때 2차방정식과 근의 공식을 공부한다면, 일단 노트 정리를 통해 2차방정식의 특성과 그래프 형태의 상관관계, 공식의 유도과정 등을 세심히 확인한 다음 여러 유형의 문제가 모두 단일한 원리로부터 추론 과정을 거쳐 해결되는 것임을 확인해야 한다. 그런데 아이가 빈둥거리는 꼴을 보지 못하고 ‘유형별로 20문제씩 100문제 풀어!’라는 식으로 많은 문제를 풀도록 명령하면, 아이는 지겨운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경험과 기억에 의존해’ 문제를 최대한 잽싸게 풀어내려고 하게 된다. 즉 ‘원리로부터 추론’하는 과정을 생략하는 것이다. 이게 습관이 되면 고등수학을 잘하는 능력은 오히려 떨어진다.

초등수학의 경우, 일단 단순 연산문제는 고등수학과 별 상관이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수능 수준이 되면 네 자릿수 나눗셈이나 세 자릿수 곱셈을 할 일이 없다. 복잡한 숫자는 모두 x나 a 같은 기호로 대체되기 때문이다. 소수는 아예 자취를 감춘다. 분수는 고등수학에서도 매우 중요하지만,        을 빨리 계산해내는 능력보다는 ‘왜 분모는 분모끼리 곱하고 분자는 분자끼리 곱하니?’라는 질문에 답하는 능력이 고등수학과 더 상관관계가 깊다. 이 질문을 오늘 당장 우리 집 아이에게 던져보라. 여러 가지 설명 모델이 있는데, 한 가지라도 답할 줄 아는 학생은 1%도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