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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의 수능 6교시는 ‘토플’

리첫 2009. 10. 5. 14:02

고려대의 수능 6교시는 ‘토플’ / 이범
한겨레
» 이범 교육평론가
지난해 고려대 고교등급제 논란이 벌어지기 시작할 무렵이던 11월25일치 본 난에 나는 ‘고려대에 내기를 건다’는 글을 썼다. 고려대가 수시 일반전형에서 1단계와 2단계를 거치는 상대적으로 ‘투명한’ 제도를 버리고, 논술을 포함한 전형요소들을 일괄합산하여 단번에 합격자를 발표하는 ‘불투명한’ 제도로 돌아갈 것이라는 데 100만원을 걸었다. 일괄합산제에서는 학생들이 불합격해도 ‘논술을 못 봐서 떨어졌나 보다’라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에, 고려대로서는 시비를 예방할 수 있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이후에 고려대 고교등급제 논란이 본격적으로 불거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내가 내기에서 이겼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실상은 반대였다. 작년 12월1일, 고려대는 다음해에도 2단계 선발 방식을 유지한다고 발표했다. 내가 내기에서 진 것이다. 그날 바로 고려대 입학처 관계자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와 ‘100만원을 꼭 받아야겠다’고 을러댔다. 그래서? 나는 100만원을 고려대 장학금으로 기부했다. 그런데 여기에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올봄 고려대가 수시 일반전형안을 최종 확정하면서, 애초의 발표를 뒤집고 내가 예상한 것처럼 ‘일괄합산제’를 도입한다고 발표한 것이다!

 

나는 결국 억울하게 100만원을 고려대로부터 갈취당한 셈이다. 하지만 어려운 형편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으로 쓰였을 테니 문제 삼지 않을 생각이다. 이번에는 1000만원 내기를 건다. 고려대가 고교등급제 논란이 한창일 때 대교협에 제출한 소명자료가 있다. 비겁하게도 ‘대외비’로 관리된 이 자료를 어찌어찌 입수해본 결과, 고려대는 수시 일반전형에서 토플과 경시대회 입상 실적을 반영했다. 학생부 비교과영역을 4가지로 분류하여 반영하는데, 그중 토플과 같은 외국어 인증시험 성적과 각종 경시대회 입상 실적이 들어 있는 것이다. 배점이 얼마였는지는 그 자료에도 나와 있지 않지만, 당연히 상당히 높은 비중을 뒀을 것이다.

 

주의하라! 특별전형도 글로벌전형도 아닌, ‘일반’전형이다. 이제 토플이 고려대의 ‘수능 6교시’에 등극했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한 순간, 나는 가벼운 흥분에 몸을 떨었다. 많은 대입 전문가들이 심증은 가졌지만 물증은 확보하지 못했던 것을, 내 눈으로 처음 확인한 것이다.

 

최근 고려대는 대형 경사를 맞았다. 올해 <중앙일보> 대학평가에서 드디어 연세대를 제친 것이다. 잔칫집에 재 뿌리는 꼴이라 미안하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 대학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받으려면 고시 합격자도 많이 배출하고 영어 강의도 늘려야 한다. 상위권 외고생들에 눈이 가는 거, 인지상정으로 이해가 된다. 하지만 기왕 그럴 거면 ‘투명’하게 하면 좋겠다. 이중플레이 좀 그만하고. 겉으로는 한국 교육을 선도하는 것처럼 미사여구로 자화자찬하면서, 뒤로는 은밀하게 토플을 수능 6교시로 삼는다? 허허, 이건 ‘김연아의 세계선수권 우승은 전화로 고대 정신을 주입해준 덕’이라고 자랑하신 고려대 총장님 말씀만큼이나 어이없다.

 

1000만원 내기의 내용은 이렇다. 첫째, 올해 수시 일반전형에서도 토플과 경시대회 입상 실적이 반영되는지 여부와, 그 반영 비율을 공개하라. 둘째, 입학사정관이 참여하는 전형에서도 토플과 경시대회 입상 실적이 반영되는지 여부와, 앞으로는 어찌할 방침인지를 밝혀라. 고려대가 한 달 내로 확실한 답을 하면 1000만원을 고려대 발전기금으로 쾌척하겠다.

 

얼마 전에 한 학생과 상담하다가 이 이야기를 해줬더니, 그 학생이 묻길 “근데 왜 전형 요강에는 그런 얘기가 없어요?” 거기에 대한 답변은 이러했다. “고려대는 원래 그런 학교야.”

 

이범 교육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