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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서 놓친 서울대 합격, 이후 바뀐 삶

리첫 2009. 11. 18. 22:14

지금으로부터 9년 전으로 거슬러가, 때는 1998년. 꽤 똑똑한 고등학생이 하나 있었다. 경남에서 공부 좀 한다는 학생들이 모인다는 경남과학고 3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S군. 맞다. 글쓴이 본인이다. 천재나 수재는 재고해 보더라도 중학교 시절 전교생 700명 중 내신 1등을 가장 많이 차지하고 과학고 문을 두드렸으니 영재라 칭하기엔 별 문제 없을 것 같다. 과학고 진학 후 필자는 생각했다. 썩어도 준치라고 이곳에서 아무리 못해도 3년 뒤에 하늘(SKY)로 날아오를 것이라고. 그렇게 17세 어린 청소년은 이미 세계의 반을 정복한 칭기즈칸이 되어 있었다.

 

2000년 고 3때 필자는 전국 과학 경시대회 우수상이라는 쾌거를 이뤘고, 이로써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수시모집에 지원을 할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되었다. 남들이 보기엔 필자가 줄곧 탄탄대로의 길을 걸은 듯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과학고 진학 후 이공계와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핑계 아닌 핑계로 학업을 소외하고 또 학업으로부터 소외되어 내신꼴찌라는 팻말을 짊어지고 살았다.

 

중학교 때까지 모의고사를 보고 나면 전교도 아닌 도 단위에서도 손가락 안에 들던 녀석이 120명 중 118등 안팎을 기웃거리고 있었으니 그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할 만하다. 필자는 이공계 학생들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보고서 작성과 프리젠테이션에 능했고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과학전람회라는 대회에 올인 하기로 마음먹었다. 고3때 친구들이 수능 준비로 다들 바쁠 때 혼자 고3 첫 학기를 온전히 투자하여 대회 준비를 하였고, 결국 수능시험을 두 달을 앞두고 전국과학전람회 우수상이라는 기적 같은 결과를 만든 것이었다.

 

추락한 영재로 남기 싫었던 필자는 자신에게 찾아 온 마지막 기회에 목숨을 걸었다. 서울대학교 모 공과대학 수시모집에 지원하여 1차 논술과 2차 심층 면접을 줄줄이 통과했다. 말에서 떨어질 뻔 했던 칭기즈칸이 보란 듯이 말의 고삐를 다시 잡고 하늘 높이 채찍을 치켜든 셈이었고, 그의 친구들은 만년 꼴등만 하던 S군이 꽤 전략적인 진학계획을 세운 것이라며 3년 만에 처음으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비로소 3차 최종 시험만을 남겨 두었는데 그것은 수능시험에서 자연계열 전체 응시자 중 상위 10% 안에 들면 되는 것이었다. 이전 사례를 찾아봐도 학교 수능 평균이 2%대를 맴도는 과학고에서 수능 10% 안에 들지 못했던 선배란 눈을 씻고 찾을 수 없었다. 전례가 그러하니 다 된 밥이나 마찬가지라 보고 모두가 미리 샴페인을 터뜨렸다. S군 어머니도 서울대에서 온 등록금고지서를 받고 농협 계좌에 돈을 넣으면서 콧노래를 불러대고 있었다.

 

2009년 11월.

 

서울대가 아닌 그렇다고 'in 서울'도 아닌 모 대학 신문사에 9년 전 그 S군이 앉아 있다. 혹자는 서울대 문턱까지 갔던 녀석이 이게 웬 말이냐고 안타까워 할 수도, 혹자는 분명히 필자가 마지막에 자만에 빠져 수능 준비를 소홀히 한 대가를 치른 셈일 테니 쌤통이라고 한심해 할 수도 있겠다. 이유야 어찌됐건 S군은 타인이 정의한 패자라는 범주에서 벗어나기 힘든 상황인지 모른다.

 

시험이란 이런 것이다. 꼭 합격할 것 같으면서도 예측할 수 없었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가망이 전혀 없어 보이면서도 기적 같이 판을 뒤엎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성공은 노력하는 자를 배신하지 않는다'라는 부정할 수 없는 진리를 과소평가하는 게 절대 아니다. 우리의 뒤통수를 칠 수 있는 것은 값진 '노력'이 아니라 바로 '시험'이라는 녀석이다. 그만큼 시험은 수많은 변수와 맹점을 안고 있는 인위적 산물이다.

 

이 시험이라는 녀석은 초등학교 1학년들이 공책 한 장을 찢어내어 선생님이 부르시는 낱말을 받아 적는 받아쓰기에서부터 스무 살 입관 시험인 수능시험, 공무원 시험, 면허 시험, 공인 외국어능력 시험 등 무수하고 다양하다. 그 방법과 모양새가 다르긴 하지만 단 하나 유일하게 모든 시험에게 적용되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시험을 치르는 당사자에게 만큼은 그 순간이 절체절명의 중요한 순간이라는 것이다. 선생님 말씀에 귀를 쫑긋 세우고 온 신경을 받아쓰기에 집중하는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의 심정은 10년을 사법고시에 매달린 고시생의 그것과 비교해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다. 적어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을 그 어린 아이에게 있어선 말이다.

 

이런 연유로 당시 필자가 받았던 충격과 고통은 적어도 본인에게만큼은 심장의 반 정도는 회생 불능으로 시커멓게 타들어 갔을 만한 극한의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물론 그것은 옆집 아저씨의 승진 시험 실패와도 맞먹는 것이고, 윗집 중학생이 엊그제 망친 중간고사와도 맞먹는 것이다. 이는 당사자의 아픔은 절대로 그것을 공감하는 제 3자가 갖는 가상의 아픔과 똑같아질 수 없는 아픔의 상대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말이다. 이런 이유로 어떤 시험이든 그 시험의 실패자는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자기만의 괴로움을 겪기 마련이다.

 

시험에서 낙방한 고통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 치자. 그렇다면 필자는 과연 결론적으로 실패를 했는가?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필자가 서울대 공과대학 수시모집 3차 관문까지 합격하여 실제로 진학하게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고등학교 3년 내내 이공계와 적성이 맞지 않아 눈물을 흘렸다면, 공대 진학 후 그가 흘렸을 것은 그냥 눈물이 아닌 피눈물이었을 것임이 틀림없다. 당장은 아프지만 자의든 타이든 과감히 그 달콤한 종기가 떼어져 나간 것이 오히려 훨씬 잘 된 것이지 아닌가.

 

필자는 수능에서 좌절을 하고 2년이란 세월을 방황했다. 6개월 간 밤낮 생활이 바뀌어 하루 소주 2병을 거르지 않고 마셔보았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만나고 그들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어머니에게 죽도록 맞을 각오로 가지고 있던 카메라와 노트북을 팔아 1박2일 일본 여행을 몰래 다녀오기도 했다. 2년 동안 수없이 어둡고, 더럽고, 치사하고, 미친 사회의 내면을 들춰봤고, 또 가끔은 인생이 왜 살 만한가에 대한 물음을 막연하게나마 대답할 자신이 생길 만큼 전에는 모르고 있던 삶의 가치를 발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토록 두루뭉술했던 필자의 적성과 열정이 놓여야 할 이상의 길을 찾은 것이다. 인생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질문하는 자, 바로 기자라는 꿈을 갖게 된 것이다. 남들보다 뒤늦은 출발선에서 필자가 발견한 그 보물은 그 무엇보다 짜릿한 감격 그 자체였다. 그리고 더 이상 9년 전 그의 시험은 실패가 아닌 매우 아프더라도 꼭 맞아야 하는 백신 주사로 뒤바뀌었다.

 

많은 사람들이 시험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시험에 웃는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좌절을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의 인생기록표에 '실패자'라는 도장을 하나 꾸욱 찍는다. 이것은 어쩌면 시험이라는 제도가 갖는 최대의 맹점은 아닐까? 적어도 세상에는 실패한 그 시험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무수한 변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는 어쩌면 필자의 경우처럼 실패한 시험이 궁극적으로 제 갈 길을 제대로 발견해 낼 수 있는 일종의 모의테스트 정도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런 이유로 시험이란 것은 180cm 미만을 루저로 만드는 것보다 더 불합리한 일괄적인 기준을 가지고 루저를 대량 생산해 내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 사회에 잣대로서 필요한 게 시험이라는 도구라면 어쩔 수 없다. 시험에서 떨어져서 콧물인지 눈물인지도 모르게 마셔대도록 펑펑 울 수도 있고 주변 사람들을 실망시킨 죄스런 마음에 죽고 싶어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명심하자. 언제까지나 그 시험이 실패나 슬픔으로 남으라는 법은 없다. 성공과 실패는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얼마든지 성공에서 실패로, 실패에서 성공으로 역전이 가능하니까 말이다. 시험에 떨어져서 낙담해만 있지 말고 거기서 배울 게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자. 필자가 찾은 보물처럼 우리 모두의 시험 실패 뒤엔 소중한 교훈이 적어도 하나씩은 숨겨져 있을 테니 말이다.

덧붙이는 글 | <나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소서> 응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