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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강의도 사회문제다

리첫 2010. 1. 9. 11:20

영어강의도 사회문제다 / 황현산
한겨레
» 황현산 고려대 불문학과 교수, 문학평론가
십수년 전에 우리 사회에 잠시 풍파를 일으켰던 영어공용화론은 이제 잠잠해졌지만 그 생명이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다. 숙였던 고개를 다시 들기 위해 늘 기회를 노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사회적 의제가 되기 어려운 방식으로 벌써 상체를 들어올린 성싶다. 무엇보다도 대학에서 하는 영어강의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몇년 전부터, 내가 소속된 대학을 비롯하여 이름 있는 대학들이 앞다투어 영어강의의 비율을 높이고 있고, 학교 밖에서도 그 비율로 대학을 평가하려는 풍조가 나타났다. 나로서는 그 폐해가 적지 않다고 보며, 자칫하다간 벌써 위기를 겪고 있는 우리 인문학이 패망의 길로 몰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 조짐은 이미 나타났다.
 

영어강의가 대대적으로 시행되기 시작할 때, 그 내용이 부실할 것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았지만 정작 중요한 문제는 다른 데 있다. 먼저 염려해야 할 것은 학문 활동과 우리말의 관계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인간의 지식과 생각은 그것이 어떤 것이건 결국은 말로 정리되고, 말을 통해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게다가 말은 정리와 전달의 수단일 뿐만 아니라, 생각과 지식을 발견하고 만들어내는 발판이기도 하기에, 결국은 지식과 생각 그 자체라고까지 말할 수도 있다. 생각이 발전하고 지식이 쌓이면 말도 발전한다. 내 경우를 예로 든다면, 내 전공 분야에서 선배 교수들이 반세기 전에 쓴 책을 지금 읽으려 하면, 프랑스어나 영어로 된 책을 읽기보다 더 힘들 때가 종종 있다. 그것은 선배들의 능력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당시의 우리말이 그들의 지식과 생각을 담거나 격려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데 더 큰 원인이 있다. 그 후 우리 사회는 지식에 대한 열정이 드높아 학문이 짧은 시간에 적잖은 발전을 이루었으며 우리말도 성장하는 쪽으로 크게 변화했다. 사회의 발전이 그에 힘입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제 중요한 논문과 강의가 오직 외국어에 의지하게 된다면, 이 발전은 중단될 것이다. 아니 중단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는 조선시대처럼 언문의 위치로 떨어질 것이다.

 

한 집단이 오래 사용해온 언어, 이를테면 모국어는 그 언어사용자들의 생활과 문화 전반에 걸쳐 측량할 수 없이 많은 경험을 축적하고 있다. 외국어에 의존하는 강의는 이 깊은 경험을 이용할 수 없다는 데도 문제가 있다. 학술활동은 연구행위와 교수행위로 나뉜다지만 강의도 연구행위의 중요한 부분이다. 강의하는 사람은 수업을 준비하면서 그 실마리만 붙잡았던 생각을 강의중에 학생들과 공동 주체가 되어 생각하는 가운데 그 생각을 정리하고 발전시켜 새로운 의견을 만들어낼 때가 많다. 이것은 누구나 지니고 있는 모국어적 직관의 덕택이다. 외국어 강의가 이 직관을 처음부터 포기하고 있다는 것은 그 강의가 주로 프레젠테이션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그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물론 외국어 강의를 철저한 교안 준비의 한 방법으로 이용하는 교수가 없지 않다는 점도 밝혀 둔다.) 외국어 강의는 선생과 학생이 함께 자기 생각을 발전시키는 현장이 되기 어렵다.

 

어떤 부당한 일을 놓고 ‘그것은 평등의 원칙에 위배된다’고도, ‘누구는 인삼 뿌리 먹고 누구는 배추 뿌리 먹나’라고도 말할 수 있지만, 그 두 말의 구체적 효과가 다르고, 그 앞에서 우리 몸의 반응이 다르다. ‘인삼 뿌리’와 ‘배추 뿌리’가 학술활동의 도구로 사용되기는 어렵겠지만, 어떤 첨단의 사고도, 어떤 섬세한 말도 이 뿌리들에 이르지 못할 때, 학문은, 적어도 인문학은, 죽은 학문이 된다. 이 사태를 사회적 비극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황현산 고려대 불문학과 교수,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