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 공부시킨다(2)
무엇보다 자유경쟁 시대가 되면, 에도시대의 지배자였던 무사들은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지금까지는 부모가 무사였으면 자신도 무사가 되는 특권이 있었다. 신분제도가 없어지면, 그러한 권리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메이지유신 뒤에는, 신분제 폐지를 반대하는 무사의 반란이 잇달았다. 제일 큰 반란은 1877년에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를 지도자로 내세운 사쓰마(薩摩)[현 가고시마(鹿兒島]의 무사들이 일으킨 반란인데, 역사 교과서에는 '세이난(西南)전쟁'이라고 나와 있다. 이러한 반란을 진압하는 데 정부는 굉장한 노력을 들이고 많은 돈을 썼다. 그렇게라도 해서 신분제도를 폐지하고 자유경쟁 시대로 만든 데에는 어떠한 목적이 있었을까? 신분이 낮은 사람들에게도 동등한 기회를 주겠다는 이상이 있었기 때문일까? 그러나 정부는 그러한 이상만으로는 움직이지 않는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자유경쟁 사회의 목적은 '일본이라는 나라'를 강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자유경쟁을 하면 왜 나라가 강해질까? 후쿠자와는 <학문의 권장>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어떤 사람은 "무지한 민중이 명령을 따르게 할 수는 있으나, 그 명령이 정치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이해시킬 수는 없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가 민중을 지배하고, 상부의 의지에 따르게 하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이 논의는 공자님의 방식이지만, 그 실태는 대단히 그릇되어 있다. ----가령 여기에 인구가 100만 명이 되는 나라가 있다고 치자. 그 가운데 1천명은 지배자인 지자(지자)이고, 나머지 99만 9천 명은 무지한 평민이다. 지자의 재덕으로 이 평민을 지배하고, 혹은 아이처럼 사랑하며, 혹은 양처럼 돌보아----평민 역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상부의 명령에 따르게 되고, 도적이나 살인사건도 없어져서, 나라를 안정되게 다스릴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의 국민은 지배자와 평민 두 종류로 나뉘어져, 주인이 된 자는 1천 명의 지자뿐으로 바람직하게 지배하며, 그밖의 사람들은 모두 아무 것도 모르는 손님이다.----국내 문제라면 이것만으로도 별 걱정이 없겠지만, 일단 외국과 전쟁이 벌어지면, 그 불편함을 뼈저리게 느낄 것이다. 전쟁이 벌어지면, 무지하고 무력한 평민들은---- 우리들은 나라의 사정 따위는 전혀 모르는 손님이다. 그러므로 목숨을 버리고 나라에 충성하는 일은 과분하다면서 도망치는 자가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나라의 인구는 명목상으로는 100만 명이지만, 나라를 지켜야 할 상황이 오면 1천 명의 지자밖에 싸울 사람이 없다. 이래서는 도저히 한 나라의 독립을 이루기가 어렵다.
일반 국민들이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아서 정치에 관해 전혀 알 수 없다면, 소수의 지배자들이 나라를 제멋대로 다스릴 수가 있다. 농민이나 도시의 주민들은 정치를 무사에게 맡겨 오직 무사들만 권력을 행사했다. 에도시대가 바로 그러했다. 평화로울 때는 나라가 안정되어 이런 사회가 좋을 지는 모르나, 막상 전쟁이 일어나면 농민이나 평민은 모두 도망쳐 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지배계급 뿐 아니라, 일반 국민도 교육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후쿠자와가 주장한 내용이다.
실제로 이러한 사태가 막부 말에 일어났다. 예를 들면, 조슈번(長州藩)[현 야마구치현(山口縣)]에서 유럽과 미국 4개국 연합함대와 전쟁했을 때, 맞서 싸웠던 자는 조슈의 무사들이었을 뿐 농민이나 평민은 "전쟁이나 정치는 무사들의 무사들의 일이지 않은가?"하며 모른 체 했다. 또한 조슈에 서구의 군대가 상륙했을 때, 그 지역 농민과 주민들은 조슈 군의 대포를 치워버리는 일을 도왔다고 한다. 이런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신분제도를 폐지하고 농민과 주민에게도 교육을 시켜 그들 자신도 '일본이라는 나라'의 운명을 짊어지는 지위로 출세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자각시켜야 된다. 이러한 점을 후쿠자와는 주장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