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략받는 나라'에서 '침략하는 나라'로
후쿠자와가 <학문의 권장>을 썼던 메이지 초기, 일본 국내는 에도시대의 신분제도를 폐지하는 등 대개혁의 시대였지만, 국제적으로는 제국주의 시대였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차츰 그들의 식민지로 만들고 있었다.
일본의 정치가나 지식인들은 일본도 그대로 방치해두면 유럽이나 미국의 식민지가 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다. 후쿠자와가 전쟁을 걱정하면서 '한 나라의 독립'을 강조한 것은 그러한 시대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나(중국)를 멸망시켜야 구주(유럽)와 동등해진다>라는 1884년(메이지 17) 9월의 시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라의 안녕을 유지하는 데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 국민을 무지한 상태로 길러 그들의 육체만을 안전하게 하고 정신의 발달을 극히 낮은 정도로 유지시켜 고통을 고통으로 느낄만한 지혜를 갖지 못하게 방법, 이것을 동양성인의 교법(敎法)이라고 한다.----- 이 방법은 세상의 문명이 유치하고 교통이 불편했던 시대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던 것으로, 지금 세상에서는 점차 세력을 잃어가고 있다. 그리고 두번째 방법은 왕성하게 국민들을 교육시켜 그들의 심신을 발달케 하고, 정신을 고상하게 하여 스스로 육체적 쾌락을 구하도록 한다. 이것을 서양 문명주의라고 한다. 이 방법이 나라의 안정을 유지시키는 데는 동양성인의 교법보다 훨씬 성적이 좋고, 훌륭하다. 그렇지만 어찌하랴! 육체의 쾌락이라는 것은 정신의 고상함을 넘어버려 심신이 발달하고 욕망이 늘어날수록 자칫하면 오히려 불평의 씨가 되는 점을 피할 수 없다. 지금 유럽의 사회가 바로 이런 상태에 있다. 지금 그 불평의 열기에 대한 배출구를 찾으려 한다면, 반드시 그 방편을 해외에서 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적당한 땅은 아시아의 중국일 것이다."
후쿠자와의 이러한 지적은 상당히 예리하다. 일반 국민을 무지한 상태로 내버려두고, 지혜를 가진 지배자만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동양성인 교법'이라고 파악했던 것이다. 에도시대의 구조는 기본적으로는 이와 비슷했다. 이 방법은 세상이 발달하지 않고, 교통이나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불편했던 시대에서만 통용된다. 예를 들면 비행기나 배가 발달해서 외국인과 외국 산물이 속속 들어오거나, 케이블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이 발달해 일반 민중이 간단하게 해외의 정보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되면, 몇몇 지배자가 마음대로 민중을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요즘 말로 하면, 세계화시대에는 일부 지배자에 의한 독재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