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을 탈퇴해서 '서양'과 한패되기(2)
전염병이라고 말할 정도이므로, 후쿠자와는 서양 문명을 무조건 칭송만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피할 방법이 없는 전염병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일본 국민에게 문명을 널리 퍼트려 '침략받는 나라'에서 '침략하는 나라'가 되자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 국민에게 바로 이 전염병을 확산시키기 위해 그는 <학문의 권장>을 썼다. 서양 문명을 빨리 흡수한 자는 '승자'가 되고, 그렇지 못한 자는 '패자'가 되어 '비천한 사람'이 된다고 설명한 것이다.
'일본이라는 나라'의 근대화는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서양 문명을 받아들여 국내에서는 '학문'을 하여 경쟁에서 이겨내고, 국제적으로는 '침략받는 쪽'에서 '침략하는 쪽'으로 정책을 바꾼다. 이를 위해 국민전원에게 의무(강박)교육을 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메이지정부는 학교를 많이 세우고, 후쿠자와도 게이오 의숙(慶應義塾:경응의숙)을 열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학교제도 흐름의 마지막 부분에 현재의 우리들이 있는 것이다.
덧붙여서 말하면, 후쿠자와는 <학문의 권장>을 쓰고, 원래의 신분이 무엇이었든 간에 학문을 익힌 자가 훌륭하게 된다고 설명했지만,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적용시킬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1882년 3월 <유전능력>이라는 시론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홋카이도(北海道:북해도) 토착민의 자식을 키워 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려고 시간을 들이고 돈을 들여 고생해가면서 지도하더라도, 그 성취의 결과가 우리 게이오 의숙의 상등교원에 미치지 않을 것이 명백하다. 아마도 그 장본인에게는 죄가 없고, 선조 이후로 정신을 연마할 기회가 없어 유전되는 지덕이 부족한 것뿐이다." 즉 후쿠자와에 따르면, 아이누(홋타이도 토착민)는 유전적인 능력이 뒤떨어지므로, 아무리 교육으 시켜도 게이오 의숙의 교원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차별도 내포하면서 '일본이라는 나라'의 근대화는 시작되었다. 다음은 이 나라의 근대화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조망해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