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에도시대에는 학교가 없었던 것일까? 그와 비슷한 것이 있기는 있었다. 무사에게는 '한<藩>(에도시대 다이묘<大名>의 영지 및 그 정치 기구--옮긴이)'의 학교인 '한코<藩校>' 등이, 평민에게는 촌락이나 읍내에 '테라코야<寺子屋>'가 있엇다. 스님이 절에서 아이들에게 불경 등을 가르친 것이 테라코야의 시초이며, 이윽고 에도시대 무렵이 되자 농민이나 상인의 아이들에게 읽기와 쓰기 등을 가르치게 되는데, 이를 종합해서 '테라코야'로 부르게 되었다. 절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테라코야라고 부리고, 여기를 다니는 아이들을 테라코<寺子>라고 불렀다.
그렇지만 이 한코나 테라코야는 지금의 소학교나 중학교와는 성격이 다르다. 에도시대의 테라코야와 메이지 이후의 소학교를 비교하면, 대개 세 가지 차이점이 있다.
먼저 테라코야는 에도시대의 사회구조에 맞추어, 신분별로 실생활에 도움되는 것을 가르친다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옛날에는 흔히 최저한의 교육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읽기, 쓰기, 주판'이라는 말리 있었다. 요즘에 주판은 과거의 유물 같은 것이지만, '읽기, 쓰기, 주판'이라는 말은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러니까 테라코야에서도 이것을 가르쳤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예를 들면 무사나 농민에게 읽기, 쓰기는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주판은 필요가 없다. 주판 공부가 필요한 것은 상인의 아이들이다. 그래서 에도시대의 테라코야에서도 산수(주판)을 가르친 것은 주로 상인의 아이들이 많은 많은 대도시의 테라코야이며, 이것은 전국 테라코야의 2할 정도다. 농촌이나 어촌, 소도시 등지에 있는 테라코야에서는 주판을 별로 가르치지 않았다.
둘째로 테라코야는 가고 싶은 사람만 간다. 즉 유지자<有志者> 교육(학문에 뜻이 있는 자를 위한 교육--옮긴이)으로 의무교육처럼 모든 학생이 가야 하는 곳은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의 공립 초, 중학교와는 달리 스승에게 사례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므로 가난한 농민이나 주민의 아이들은 경제적 여건이 안 되어 갈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