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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사회가 만들어지기까지(3)

리첫 2010. 5. 13. 13:23

우선 생각해보면, 가난한 농민의 아이는 미래에도 가난한 농민이 되도록 정해져 있다. 게다가 아이들은 농가나 상가에서 귀중한 일손이다. 그러므로 아이들을 테라코야에 보내 사례를 지불하고 읽기, 쓰기 따위를 공부시킬 시간이나 돈이 있다면, 농업이나 장사를 거드는 것이 낫다고 부모들은 생각하기 일쑤였다. 예를 들면, 촌장의 아들은 장래에 마을의 분쟁을 조정하는 역할을 할 촌장이 될 것이므로, 관리들과 주고받는 편지를 쓰기 위해 읽고 쓸 필요가 있다. 이런 경우는 테라코야에서 읽고 쓰기를 배울 필요가 있다고 부모들도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나 여자에게 공부 따위는 필요도 없고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셋째로 테라코야는 지금의 소학교처럼 단체수업방식도 아니고, 교육과정이 정확히 정해져 있던 것도 아니었다. 또 여섯 살에 입학한다든지 4월에 입학한다든지 정해진 규칙도 없었다. '단체수업'은 선생님이 학생들 앞에 서서 가르치면, 학급 전원이 같은 내용을 배우는 방식을 말한다. 그리고 '교육과정이 정해져 있다'는 말은 현재의 소학교에서는 문부과학성이 소학교에 가르쳐야 할 내용을 정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지금은 어느 소학교에 가도 기본적으로는 문부과학성이 정한 방침에 따라 교육이 행해져서 모든 과정을 마치면 문부과학성이 공인한 졸업증서를 받을 수 있다.

 

그런데 테라코야는 수시로 입학하고, 퇴학하는 경우가 많았다. 연령도 일곱 살 정도에 들어온 아이가 있는가 하면, 열일곱 살에 들어오는 사람도 있었다. 입학 시기도 에도의 테라코야는 대개 2월로 정해져 있었지만, 지방마다 제각기 달랐다. 그러므로 농촌 지방의 테라코야에서는 비교적 한가한 때가 되면 "우리 아이도 테라코야에 보내볼까?"라고 부모들이 생각을 한다. 그때가 1월이든 11월이든 상관없이 편할 때 테라코야에 데려온다. 농번기가 되면, 아이들은 자기 집의 모심기나 벼베기를 도와야 하므로 테라코야 역시 수업이 거의 없거나 방학에 들어가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각지의 테라코야는 제각각 테라코야 선생님이 선택한 교과서 [<오라이모노(往來物:왕래물)> 라고 부르는 부독본(副讀本:부독본)(편지 예문집)을 주로 사용했다]로 가르쳤다. 퇴학하는 것도 부모가 "이제 이 정도 읽고 쓰기를 할 수 있으면 괜찮겠지?"라고 생각하면, 5년을 다녔든지 3년을 다녔든지 관계없이 퇴학한다. 정부 공인의 졸업증서 따위는 물론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의 소학교보다는 문화센터에 가까워서 "그런게 학교인가"라고 생각할 것이다. 문화센터도 각각의 문화센터 선생님이 좋아하는 방법으로 가르치고, 다니는 사람도 가고 싶을 때 가며,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두고, 졸업증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테라코야도 이와 거의 같다. 하물며 한 달 전에 막 들어온 아이와 2년 정도 다닌 아이가 함께 공부할 정도이니까. 선생님의 지도는 학생마다 개별 지도가 원칙이었다. 대개 테라코야의 교육은 학생이 교과서를 읽거나 베끼면서 읽고 쓰기를 익힌다. 선생님이 학생들 책상 사이사이를 돌거나 교실 앞으로 나오게 해서 틀린 것을 지적하거나 개별 지도를 한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