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조중동 망해도 '역사신문' 살아남는 까닭

리첫 2010. 5. 18. 12:40

타블로이드 신문 한 장 펴기도 힘든 출퇴근길 전동차. 그 좁은 틈바구니에서 스마트폰으로 뉴스 보는 풍경이 낯설지 않다. 요즘 주요 일간지들도 스마트폰용 '모바일 신문'을 앞 다퉈 내놓고 있다. '인터넷 신문'이 등장한 10여 년 전 미적거리던 것과는 사뭇 달라진 분위기다. 

 

TV, PC, 인터넷, 스마트폰 등 '뉴미디어'가 등장할 때마다 '활자 매체 위기론'이 불거지곤 했다. 물론 그 영향력은 점점 줄고 있지만 '종이 신문'은 아직 건재하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그날의 주요 기사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지면 편집 때문일 것이다. 오죽했으면 손바닥 만 한 스마트폰에까지 지면 편집을 그대로 옮겨놓았을까.

 

지난 15년간 역사 분야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은 사계절 <역사신문> 시리즈 역시 이런 '종이 신문'의 묘미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날그날 뉴스를 모아놓은 걸 역사로 봤을 때, 신문은 꽤 잘 어울리는 틀이다. 그렇지만 일제 강점기로 끝맺으며 여운을 남겼던 <역사신문>과 2차 세계대전 직후까지만 다뤘던 <세계사신문>이 올해 <근현대사신문>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건 단지 그 이유만은 아닌 듯하다.   

 

신문 같지 않은 신문: 당대 언론과 차별화된 역사가의 시선

 

<근현대사신문> 2권인 '현대편'은 1945년부터 2003년까지를 다룬다. <역사신문> 5, 6권과 겹치는 1권 '근대편(1875~1945)'과 달리 '역사신문'이 처음 다루는 영역이다. 자연 손길은 현대편에 먼저 갔다. 해방부터 한국전쟁, 4월혁명, 5·18, 6월항쟁으로 이어지는 파란만장한 현대사가 대체 어떻게 '보도'되고 있는지 궁금했다. 아울러 현대사의 굴곡을 함께한 <조선>, <동아>, <한국>, <경향> 등 종이 신문들의 당시 지면과 직접 비교도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곧 이런 시도는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았다. 일단 <근현대사신문>의 주요 참고자료 중 하나가 당시 신문들인 데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역사가의 시선으로 당시 언론들이 놓쳤던 시대적 흐름까지 짚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뉴스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나 주요 사건에 대한 평가 역시 당시 주류 언론과 판이한 경우가 많았다.

 

1970년 전태일 분신,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1986년 보도지침 폭로 등 당시 언론이 철저히 함구하거나 왜곡했던 국내 뉴스들은 물론, 합법적인 사회주의 정부를 무너뜨린 1973년 칠레 군부 쿠데타 등 반공 정권의 서슬 아래 묻혀 있던 국제 뉴스까지 '제자리'를 찾아주고 있다.

 

그나마 막혀 있던 언로가 트인 1987년 6월항쟁 이후도 마찬가지다. 이때부터는 오히려 정보의 홍수에 '진실'이 묻혀버리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당장 2002년 6월 한일월드컵 '4강 신화'에 묻힌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사망 사건이 대표적이다. 그래서 <근현대사신문>은 월드컵 뉴스보다 그해 말 서울 광화문 일대를 촛불로 물들인 여중생 사망 사건에 더 주목한다.

 

마찬가지로 1997년 IMF 구제금융을 '신자유주의의 제3세계 길들이기'라고 비판하는가 하면, '여성 상품화'란 비판을 받아온 온갖 미인 대회 대신 '안티미스코리아대회'를 문화면 주요 기사로 뽑는다.

 

역사책 같지 않은 역사책: 시대감 살린 '신문스러운' 장치들

 

  
<근현대사신문> 표지
ⓒ 사계절
근현대사신문

다만 역사가의 관점이 지나치게 개입될 경우 오히려 '신문'다운 '시대감'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적어도 미래에 벌어질 상황을 미리 알고 기사를 쓰는 '기자'는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사설이나 해설 기사 등 일부를 제외하고 가능하면 당대의 관점을 살리려는 노력도 엿보인다. 대신 지면에 담지 않은 후대의 평가나 후일담에 대해선 일종의 주석 형태로 뒤에 따로 묶었다('따라잡기').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한강 다리가 폭파돼 북한 점령지에 남게 된 이들에게 '부역' 딱지를 붙여 '빨갱이 사냥'을 했다는 기사에 "그들(도강파)은 나를 빨갱이년이라고 부르며 짐승이나 벌레처럼 바라본다"고 증언한 19세 여성 박완서씨가 등장한다. 그가 실제 소설가이고, 이 내용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란 작품에 담긴 경험이란 사실도 '따라잡기'를 봐야 알 수 있다.

 

1961년 5.16 쿠데타 직후 북한에 동조했다는 혐의로 사형당한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이 2008년 재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아 47년 만에 누명을 벗었다는 사실 역시 본문에는 넣지 않았다. 

 

한 호가 2~4년 단위로 묶이면서 글쓴이의 관점까지 그 시대에 한정하는 이런 기술적 장치들은 역사책이 아닌 '신문 읽기'의 묘미를 그대로 살려준다.

 

또 시대 범위가 넓다고 해서 정치, 사회 중심의 큰 뉴스만 다루는 건 아니다. 보통 신문의 절반 정도를 연성 기사가 차지하는 것처럼 과학면과 문화면, 생활·단신면을 별도로 둬 지금까지 역사책에서 보기 어려운 소소한 읽을거리들도 많다.

 

1962년 무인 공중전화기가 등장하기 전까지 관리인이 직접 공중전화요금을 받았다는 사실, 요즘 아이폰과 아이패드로 유명한 애플 CEO 스티브 잡스가 33년 전인 1977년엔 '애플II'를 선보이며 개인용 컴퓨터(PC) 시대를 열었다는 사실, 생수 제조는 1975년부터 허용됐지만 20년 가까이 흐른 1994년 대법원 판결이 있고 나서야 시판이 완전히 허용됐다는 사실도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종이신문'은 망해도 '역사신문'은 살아남는 까닭

 

사실 출퇴근길에 이 책을 읽으면서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일단 다른 책보다 판형이 커서 주변 사람 눈치를 봐야 했고, 가방 무게도 만만치 않아 늘 어깨를 짓눌렀다. 찾을 내용이 있어 책을 여기저기 뒤적거리다 보면 편리한 '인터넷 검색' 기능이 절실했다.  

 

그래도 이 책을 끝까지 놓을 수 없었던 건 바로 '신문 같지 않은 신문'과 '역사책 같지 않은 역사책'이란 이중적 모습 때문이었다. 당대의 정파적 이해에서 벗어났기에 어떤 신문보다도 신문답고, 당대 생활인의 관점에 한 걸음 다가섰기에 그 어느 역사책보다 더 역사책다웠다. '속보'는 넘치되 '관점'이 부족한 시대, '종이신문'은 망해도 '역사신문'은 계속 이어지리라 믿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