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오랜 시간 스트레스를 받으며 영어를 공부합니다. 그 경제적 배경인 ‘오프쇼어링’을 뜯어봅니다.
최근 다녀온 중국 출장에서 가장 강하게 느낀 것은 역시 외국어의 중요성이다. 한중일 3개국 연구자가 모여 회의를 진행하니, 결국 언어가 가장 큰 변수였다. 영어 구사가 자유로운 연구자와 그렇지 않은 연구자 사이에 발언력 차이가 컸다. 그 둘 사이에는 결국 연구 결과물에 끼치는 영향력도 차이가 나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 정도였다. 한중일 3개국어를 하는 연구자의 발언력은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다.
한중일 사이의 교류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앞으로 더 많은 나라 사이의 더 많은 교류가 더 많은 분야에서 일어날 것이다. 외국어를, 최소한 영어라도, 자유롭게 구사하지 않고는, 이런 시대를 이끌어가기는 커녕 적응하기도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다.
영어의 정치경제학
<영어완전정복>이라는 영화에서 영어 때문에 된통 낭패를 당하는 동사무소 직원을 보고 포복절도한 일이 있다. 하지만 웃음의 뒷맛은 씁쓸했다. 영어 쓰는 나라와 국경이 맞닿기는커녕 한 대륙에 함께 있지도 않으면서 평생을 영어 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사는 한국 사람들의 삶이, 조금 객관적인 렌즈로 들여다보니 너무나 우스꽝스럽게 보였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한국의 영어 교육 열풍은 열병에 가깝다. 태어난 지 1년6개월 된 영아를 상대로 한 영어 교육이 생겨나는가 하면, 노인들도 영어 배우기에 열심이다. 우리 말이 훼손될까 걱정스럽기도 하고 그 사교육에 들어가는 비용 때문에 힘겹기도 하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 열풍은 합리적인 구석이 있다. ‘영어’라는 언어가 단순히 ‘미국말’을 넘어, 세계 경제를 주름잡는 언어 권력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계 경제에는 영어를 중심으로 거대한 산업 지도가 그려지고 있다. 기존 경제 강국인 미국과 영국에 인도와 아일랜드가 신흥경제강국으로 떠오르면서, 영어의 위상은 어느 때보다도 높아졌다. 영어를 중심으로 미국, 영국, 캐나다, 인도, 아일랜드, 이스라엘, 필리핀 등이 뭉쳐지면서 거대한 경제권이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그 중심에 있는 단어, ‘오프쇼어링’ (offshoring; 해외 아웃소싱)은 ‘대영 제국’ 이후 영어권 국가들이 다시 단결에 나선다는 사실을 알리는 힘찬 전주곡으로 등장하고 있다.
아웃소싱은 휴머니즘이다?
“오프쇼어링(해외 아웃소싱; offshoring) 업무를 직접 해보면, 여기에 쏟아지는 비판들이 얼마나 건조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완전히 다른 문화에 속한, 먼 거리에 있는 사람들과 협력해 일하고 결과를 창조해 내는 건 정말 환상적인 경험입니다. 이건 사람들 사이의 편견과 장벽을 없애는 휴머니즘입니다.”
연단에 올라 목청을 높이는 사람은 터번을 두르고 인도 전통의상을 입었지만,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이었다. 미국과 인도 사이 오프쇼어링 다리를 놓는 기업인 ICICI원소스 영업담당 부사장 사트원트 싱 칼사는 요즘 미국 대선 정국의 뜨거운 화두인 오프쇼어링 논란을 ‘협력’ ‘창조’ 같이 아름다운 단어를 사용해 단박에 정리해 버렸다. 그러면서 슬쩍 한 가지 단서를 덧붙인다. “물론 다 같이 영어를 쓴다는 것도 큰 도움이 됩니다.” 그는 MIT슬론이 MBA과정에 발빠르게 개설한 ‘오프쇼어링’ 과목의 초청 연사였다.
최근 언론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오프쇼어링’이란 해외 아웃소싱의 새로운 버전이다. 아웃소싱은 전통적으로 경제선진국 공장을 노동력이 싼 개발도상국으로 옮기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오프쇼어링은 공장이 아닌 서비스 업종의 해외 아웃소싱을 주로 의미한다. 엑스레이 해독, 콜센터, 회계 업무 등 과거에 자기 나라 안에서만 해결 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서비스 업무들이 선진국에서 개발도상국으로 속속 옮겨가고 있는 현상을 통칭한다. 인터넷과 통신기술의 발달로 가능해진 현상이다. 요즘 이슈는 특히 미국에서 인도로 옮겨가고 있는 일자리들이다. 제품 하나를 통째로 해외 공장에서 생산하는 예전의 아웃소싱과 달리, 오프쇼어링은 기업 업무의 한 과정을 내보낸다는 의미에서 비즈니스 프로세스 아웃소싱(BPO)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일자리 해외 이전 문제로 미국을 시끄럽게 만들고 있는 주제다.
아멕스에 건 전화를 인도에서 받다
칼사 부사장은 퍼스트링 (FirstRing) 이야기부터 꺼냈다. 퍼스트링은 ICICI가 지난해 인수한 인도의 콜센터 전문 기업이다. 예를 들어 퍼스트링에 콜센터를 아웃소싱한 미국 신용카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고객이 카드 사용내역을 조회하기 위해 회사에 전화를 한다고 치자. 미국 무료 전화번호로 연결된 전화는 자동으로 태평양을 건너 인도 뱅갈로르까지 가 닿는다. 전화를 거는 고객은 전혀 깨닫지 못하지만, 그를 응대하는 사람은 태평양 건너 뱅갈로르의 상담원이다.
의료 필사 대행업체 헬스크라이브 (HealthScribe)는 인도에 1200명의 종업원을 두고 있다. 이들이 하는 일은 미국 병원에서 의료진이 구술한 내용을 음성파일로 받아 24시간 안에 타이핑해 문자파일로 다시 전송해주는 일이다.
이뿐만 아니라 그래픽 디자인, 재무 분석, 법률 필사, 심지어 방사선 촬영기록 해독까지 원거리에서 디지털로 이뤄질 수 있는 일자리들이 앞다퉈 태평양을 건너가고 있다. 다국적 컨설팅업체 맥킨지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오프쇼어링은 앞으로 5년간 매년 30~40%씩 늘어날 것으로 예측됐다.
물론 오프쇼어링이 이처럼 급증하는 것은 미국과 개발도상국들과의 임금격차 때문이다. 의료 필사의 경우, 미국에서 작업하면 월 3천여 달러(300만원)의 임금을 줘야 하는데 반해 인도에서 하면 월 300달러(30만원)로 해결된다. 좀 더 고급 기술인 소프트웨어 개발자의 경우 미국에서는 시간당 60달러(6만원), 인도에서는 시간당 6달러(6천원)다. 인터넷의 발달로 파일 전송 등에 들어가는 제반 비용도 엄청나게 줄었다.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일하는 사람들의 수준과 태도다. 콜센터의 예를 들면, 미국에서 이런 일은 저임금 노동으로 여겨진다.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들이 맡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인도에서 이 일들은 최고급 노동이다. 가장 잘 교육받은 사람들이 담당하게 된다. 당연히 생산성도 인도가 월등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저런 사정을 살펴보면, 기업으로서는 마음에 쏙 드는 비용절감 방안이 아닐 수 없다.
오프쇼어링, 단순 업무에서 고급 업무로 진화
저임금에다 교육수준 높은 노동력이라면 중국이 인도보다 훨씬 풍부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왜 인도인가? 칼사 부사장이 힌트를 줬던 것처럼, 이는 전적으로 언어 탓이다. 실제 비즈니스 프로세스 오프쇼어링은 영어권 국가들에서 훨씬 번성하고 있다. 맥킨지 연구에 따르면, 2001년 현재 미국에서 인도에 내보낸 비즈니스 프로세스 아웃소싱 업무는 77억 달러(7조7천억원) 규모다. 여기에 아일랜드 83억 달러(8조3천억원), 캐나다 37억 달러(3조7천억원), 이스라엘 30억 달러(3조원), 오스트레일리아 4억 달러(4천억원), 필리핀 3억 달러(3천억원) 등 영어권 국가들이 모두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중국은 11억 달러(1조1천억원), 국경이 인접한 멕시코도 5억 달러(5천억원)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인도 아웃소싱 붐이 일고 있는 요즘, 인도와 다른 나라들 사이 격차는 훨씬 더 벌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통계는 나와 있지 않지만, 영국과 인도 등 영어권 개발도상국 사이의 오프쇼어링도 상당히 진전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특히 상대적으로 자유무역과 시장경제에 우호적인 영/미 전통이 이런 흐름을 강화하고 있다. 영어권과 비슷한 경제력을 자랑하지만, 일본과 독일은 언어나 문화 때문에 오프쇼어링에 덜 적극적이다.
경제학자들은 오프쇼어링을 통해 전략기획/마케팅/재무 등 기업의 핵심 고급기능과 직접 대인접촉이 필요한 의료 등의 서비스를 미국에서 맡고, 그 이하 단순한 업무들은 인도 같은 영어권 개발도상국에서 맡는 형태로 새로운 국제 분업이 이뤄질 것이라고 보고 있다. 무력으로 건설됐던 대영 제국(Great Britain)이 이제는 경제를 매개로 한 ‘대 영어 제국’ (Great English)으로 재건되고 있는 셈이다.
한편 이미 이런 분업은 사라지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 최근호를 보면, 다국적기업들은 R&D 부서 등 핵심 고급기능을 인도나 싱가포르 같은 곳에 설치하기 시작했다. 고급 업무와 단순 업무를 지역별로 분업해 처리하는 대신, 고급 업무도 단순 업무도 전 세계로 분산시키는 형태로 오프쇼어링이 더욱 확대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금융과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국경을 허물었다. 국경을 넘어선 경제는 이제 언어와 문화를 새로운 경계로 삼아 거대한 가치 사슬을 만들어내고 있다. 지금 우리는 못다 정복한 영어책을 다시 꺼내 들고 그 가치 사슬의 주변부에라도 끼어들려 노력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그들의 가치 사슬로부터 침략당하지 않도록 더 열심히 우리의 문화적 경계를 지켜야 하는 걸까.
한국인들의 영어교육 열풍, 조기유학 열풍은 어쩌면 가치 사슬의 주변에라도 숟가락을 얹겠다는 본능의 몸부림인지 모른다. 국경이 무력으로 허물어졌던 식민의 시대에 이어, 또 다시 민족의 운명과 국경을 안녕을 걱정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출처:한겨레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