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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학교를 불태우다(1)

리첫 2010. 5. 23. 12:32

여기까지 읽으면서 "지금의 소학교보다 테라코야가 좋구나"라고 생각하는 있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개별 지도로 가르쳐주기도 하며, 가고 싶을 때 가고 그만두고 싶을 때 그만두어도 좋으며, 가고 싶지 않은 사람은 처음부터 가지 않아도 된다. '등교 거부' 따위의 문제는 일어날 조짐조차 없다. 그러나 이것은 반복하지만, '농민의 아이는 농민'이라는 신분제도와 일치한다. 그리고 후쿠자와가 말했듯이, 이 상태를 방치해 두면 일본은 '서양'의 식민지가 되어버릴 염려도 있다.

 

그래서 메이지정부로서는 이러한 교욕 방식을 개선해 의무(강박)교육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었다. 즉, 여섯 살이 되는 해에 4월이 되면, 어떤 아이라도 모두 학교에 보내 문부성이 정한 교육 내용을 똑같이 배운다는 형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학교 제도를 정착시키는 데는 여러 가지 많은 문제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부모들이 저항했다. 농민이나 상인인 부모 입장에서 본다면, 아이들은 논이나 상점에서 일을 할 수 있는 귀중한 일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교 같은 데 갈 시간이 있다면, 논을 손질하거나 상점의 일을 거들게 하려는 부모가 많았다.

 

당시의 부모들은 학교에서 읽기, 쓰기나 산수를 공부하더라도, 농민이 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후쿠자와가 설명했듯이, 학교를 졸업하면 출세가 보장된다는 생각이 아직 정착되지 않았으므로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메이지정부는 재정난으로 학교 설치나 유지 비용을 지방이 부담하도록 하고 있었다. 학구(學區) 내의 각 호(戶)에 부담금을 할당해 수금하거나 지방의 부자들에게 반강제적으로 기부 등을 하도록 부담시키고 또, 가난한 민중의 처지에서 볼 때, 꽤나 높은 수업료를 학생의 부모에게 받았다.

 

더구나 서양근대식 교육을 실시하려고 해도,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가르치는 쪽도 처음에는 잘 몰랐다. 그래서 메이지 초기의 소학교에서 사용된 교과서나 괘도 등은 테라코애처럼 실생활에 바로 도움이 되는 편지 예문집 등이 아니라, 일단 서양식이라는 원칙 아래 일본사회의 실태와는 동떨어진 서구의 교재를 번역한 것이 많았다. 예를 들면, 레몬이 있을 리 없는 당시의 일본에서 '레몬 색'이란 명사를 후리가나(한자를 읽는 음을 일본문자로 옆에 표시한 것--옮긴이)도 달지 않은 채, 소학교 학생에게 가르치기도 했다. 학생들은 물론 선생님도 레몬의 실물을 본 적도 없을 텐데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