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상황이 변하기 시작한 때는 메이지 20년(1887)대 중반을 지나면서부터다. 먼저 1895년(메이지 28)에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해서 청나라로부터 당시 일본 국가재정의 4년치 이상에 상당하는 배상금을 가로챌 수가 있었다. 이 돈으로 교육기금이 만들어지고 국고 보조금도 늘어, 1900년에는 소학교 수업료가 폐지되었다. 청일전쟁의 배상금에서 교육기금이 할당된 것은, 국민을 교육시킨 것이 전쟁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실제 전쟁을 해보고 잘 알게 된 것과 관계있다. 읽기, 쓰기나 산수도 할 수 없는 병사 따위는 근대 전쟁에서는 쓸모가 없다. 병사들이 명령문이나 병기의 설명서도 못 읽는다든지, "백발 쏴!"라는 명령을 받아도 백까지 셀 수 없다면, 전쟁하는 데도 상당히 고생한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때부터 일본의 산업 또한 발달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는 학교에서 읽기 쓰기나 산수를 배웠더라도, 농민의 아이는 역시 농민이 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직업이 다양하지 않았다. 그러나 산업의 발달이 궤도에 오르자, 공장과 회사가 많이 생겨서 직장이 늘어났다.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서는 읽기, 쓰기나 산수를 할 수 있는 것이 유리했다. 근대적인 회사나 공장에 취직하기 위해서는 병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교육이 필요하다. 서류를 읽고 쓸 수 없는 회사원이나 기계의 매뉴얼을 읽지 못하는 공장의 노동자나 수를 계산할 수 없는 종업원은 근대 산업에서는 필요 없다. 그래서 기업은 학교를 졸업한 사람만을 고용하고 싶어한다. 한마디로 학교에 가면 나중에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가질 수 있게 된다는 것, 그렇게 되면 부모들도 아이를 학교에 보낼 명분이 생긴다.
메이지 중엽쯤에 이르면 '월급쟁이'라는 말이 생기게 된다. 역사학자인 기타 사다키치(喜田貞吉:희전정길)의 <환갑기념 60년의 회고>라는 책에서 회상하고 있는 부분을 잠깐 소개해보겠다.
"-----내 중학교 시절, 월급쟁이는 굉장한 것이었다. 여하튼 병이 나서 쉬어도, 일요일이라도, 혹은 여름휴가에도 일정한 급료를 받으며 일용직 노동자나 농민과는 도저히 비교도 안되는 수입이 있고, 세간에서는 존경받으며, 뭇사람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는 직업이었다."
"최하급으로서 우선 소학교 교원을 손꼽아야 할 것이다. 그때 사범학교 졸업생의 초임이 도쿠시마(德島) 현에서 6엔---- 그래도 시민이나 장인(기술자)보다 훨씬 좋다. 중등학교 선생님이 되면 통례적으로 15~30엔, 더구나 법학사 아무개 씨가 교장으로서 월급 60엔, 고등사범 출신의 아무개 씨가 교감으로서 월급 40엔---- 당시 나 같은 사람은 한달에 불과 1엔 50전의 식비로 생활할 수 있었으므로, 전자는 40명, 후자는 36~37명을 부양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현령(당시의 현지사<縣知事>로 우리나라의 도지사---옮긴이)이 되면 더욱 엄청나서 월급은 실로 250엔---- 고임금자에 대한 세간의 존경도 역시 대단하고, 따라서 위력도 굉장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