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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서울(IN-SEOUL)대학 나와도 루저(LOSER)

리첫 2011. 3. 15. 16:09

 

동급생 제자 둘이 오랜만에 찾아왔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을 했던 아이들이니 얼굴을 본 지 얼추 10년 가까이 흐른 것 같다. 낼 모레면 서른이라는데, 키도 훤칠하게 커진데다 수염이 덥수룩해 어색함마저 느껴졌다. 길에서 만나면 누군지 모른 채 지나칠 만큼 참 많이도 변한 모습이었다.

 

요즘 뭐하고 지내는지 물었다. 하긴 이런 질문, 그저 데면데면한 분위기에서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한 지극히 상투적인 것일 뿐인데도 요즘 들어 제자들에게조차 묻기 편치 않은 질문이 돼 버렸다. 다행히도 내 건강과 아내, 아이들의 안부를 되물으며 별 부담 없는 듯 웃으면서 대답해주었다.

 

둘 모두 군대 다녀와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 각각 서울과 고향인 광주에서 학원 강사 일을 하고 있단다. 대학 때 전공이 분명 사회학과 건축학인데, 생뚱맞게 하나는 영어를 다른 하나는 수학을 가르치고 있다는 거다. 둘 모두 취직을 위해 잠시 '알바'를 할 요량으로 시작했는데, 하다 안 되면 눌러앉을 생각이라며 겸연쩍게 웃어보였다.

 

대학 졸업 후에도 낮에는 여전히 수험생, 밤엔 보습학원 강사

 

대학 졸업 후 지금까지 낮에는 여전히 공부하는 수험생으로, 밤에는 보습 학원 강사로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다지만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나이도 나이인데다 한곳에 '올인'을 해도 쉽지 않은 판에 두 가지 일을 병행해야 하는 건, 자칫 게도 잃고 구럭도 잃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잘 알기에 그들 모습이 조금은 안 돼 보였다. 지친 얼굴에 불안함이 덧씌워진 모습이랄까.

 

'청년' 하면 얄궂게도 '실업'을 먼저 떠올리는 요즘, 누구 말마따나 보습 학원은 취업난에 허덕이는 대학 졸업생들에게 그래도 제법 만만한 '바늘구멍'이다. 전공을 살릴 수 있는 취직자리는 아니어도 그들에게는 막막한 사막 한복판의 오아시스와도 같은 존재다. 기실 보습 학원 등 사교육의 '도움'이 없다면 청년 실업률은 실로 엄청날 것이다.

 

공교롭게도 둘 모두 낮에 영어 학원에 등록해 다니고 있단다. 언제부턴가 대학 성적증명서나 주민등록등본처럼 취직을 할 때 제출해야 할 필수 목록이 돼버린 토익 점수를 조금이라도 높일 요량이다. 몇 해 전만 해도 대략 700점 이상이면 그런대로 마음이 놓였다는데, 지금은 900점 안팎인 사람들이 수두룩한 터라 불안해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사교육에 기대어 어렵사리 번 돈을 다시 사교육에 들이붓고 있는 셈이다. 굳이 그들 스스로의 위안거리라면 또래들 대부분이 그렇게 생활하고 있다는 것이다.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며 졸업을 늦추는 것도, 어쩔 수 없이 대학을 졸업했지만 막상 갈 곳이 없어 다시 취업을 위한 학원을 전전하는 것도 지금 우리 시대 청년들의 일상이긴 하다.

 

스트레스로 따지면 그 가혹하다는 고3 시절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고 했다. 곁눈질 하지 않고 오로지 공부만 하면 됐던 그때가 외려 행복했다며 둘은 서로 맞장구쳤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 입시 공부를 한다면 명문대 합격 정도는 떼어 놓은 당상일 거라며 호기롭게 말했는데, 막상 녹록지 않은 현실에 대한 푸념처럼 들렸다.

 

사교육 전도사가 돼버린 제자들

 

술잔이 몇 순배 돌자 최근 광주 등 일부 지역에서 시행된 밤 10시 이후 고등학교 야간자율학습(야자) 금지와 학원 영업 금지 조항에 대한 얘기로 대화가 옮아갔다. 스승과 제자가 아닌, 흡사 학교 교사와 학원 강사로 마주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예상은 했지만, 막상 해보니 알겠더라면서, 그들은 마치 사교육 전도사가 되어 공교육의 대척점에 서서 사교육을 철저히 옹호했다.

 

밤 10시 이후 학원 영업을 금지하려면 일선 고등학교에서 야자를 완전 자율화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밤 10시 이후 야자를 금지한다지만 지금까지의 관행상 모든 학교가 자율이라는 이름으로, 실은 반강제적으로 실시할 게 뻔하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되면 적어도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학원 운영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고, 사교육 수요가 존재하는 한 음성화되어 불법 운영이 판 칠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아울러, 우리나라와 같은 무한경쟁 사회에서는 사교육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고 단언하면서, 공교육의 질을 높이고 사교육의 폐해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GDP에서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는 사교육의 '위상'을 우선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공교육이 부실해서 사교육이 창궐할 수밖에 없다더니, 이젠 사교육이 필요악이라는 시각을 넘어 숫제 우리 경제를 지탱하는 한 축인 양 위세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공교육의 수준이 높아지면 사교육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라는 과거의 '수세적인' 반응은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사교육은 기껏해야 공교육의 보완재 정도로 이해됐는데, 이제는 공교육과 경쟁하는 대상을 넘어 대체재인 양 행세하는 모양새다. 그러나 '위상'을 운운하면서도 그들에게는 정작 가장 중요한 아이들의 건강권과 전인적인 성장에는 별 관심이 없다. 아침 7시부터 밤 10시가 넘어서까지 주구장창 딱딱한 의자에 앉아 공부만 해야 하는 아이들의 고통스러운 학습 노동에 대한 공감 자체가 빠져있다.

 

대학에 다니면서도 사교육에 의존해야 하는 현실

 

셋 모두 술이 불콰해졌고 논쟁도 뜨거워졌다. 법 제정 취지에 반대하는 것은 아이들을 오로지 돈벌이를 위한 대상으로만 인식하기 때문이라며 나무랐다. 사교육은 반드시 사라져야 할 이 땅의 해악이라고 선언하듯 말했고, 제자 둘은 학벌구조가 굳건히 똬리를 틀고 있는 우리 현실에서 서로 '배려'하지 않으면 공교육이 되레 더 큰 상처를 입게 될 것이라 응수했다.

 

그들은 입시를 앞두고 있을 때보다 대학에 다니면서 사교육에 더 많이 의존하게 됐다고 한다. 대학 동기와 선후배들 중 사교육을 받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었다면서, 대학의 학사일정에만 충실하면 달랑 졸업장만 받을 수 있을 뿐이라고 조롱하듯 말했다. 사교육을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중고등학교 학생들만의 문제라고 보는 건 잘못된 인식이라고 꼬집었다.

 

거칠게 말해서, 사교육을 통해 대학에 들어가도 여전히 사교육에 의존하고, 졸업 후에도 다시 사교육을 벗어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적잖은 수가 보습 학원 등 사교육에 취업하는 현실인 셈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에게 사교육의 폐해 따위를 운운하는 것은 '공자 왈, 맹자 왈'일 수밖에 없다.

 

전공은 안 보고 대학 '간판'만... 명문대 출신이면 '만사형통' 

 

  
서울대 정문
ⓒ 권우성
서울대

정작 놀라웠던 건 따로 있었다. 우리 교육의 모든 병폐는 학벌 구조에서 온다고 단언했던 그들이 수강생을 끌어 모으기 위해 되레 학벌을 이용하고 조장하는 첨병으로 나섰다는 점이다. 학원 강사라는 그들의 처지를 이해 못할 바는 아니나, 신념과 다른 행동은 그들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 뿐이었다.

 

젊은 그들의 입에서 가장 많이 튀어나오는 얘기는 역시나 '현실'이었다. 강사를 채용할 때 전공은 거의 보지 않으며, 대학의 '간판'에 따라 급여조차 다르다고 했다. 학벌이 좋은 강사가 오면 학원 홍보 효과가 있어 수강생이 쉽게 모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무런 관련이 없어도 학원 이름과 간판에 명문대 심벌마크를 내거는 판에 강사가 명문대 출신임에랴.

 

마치 '현실'을 직시하라는 듯, 제자 둘은 내게 반문했다. "우리나라에서 학벌 구조가 이렇듯 공고한 이유가 뭔지 아세요? 천지개벽이 일어나지 않는 한 깨지지 않을 걸요." 그러고는 답할 짬도 주지 않은 채 스스로 답했다.

 

"고위공직을 일부 명문대 출신자들이 독점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라지만, 저희 같은 '소시민'은 그런 건 눈에 보이지도 않아요. 올라가지 못할 나무 쳐다보지도 않는 격이랄까요. 외려 고위공직은커녕 생존을 위한 취업 전선의 맨 밑바닥에서조차 밀려난 대다수의 젊은이들이 그들의 동생과 후배들에게 좋은 학벌이 아니면 '루저(loser)'라고 푸념하는 고백 속에서 시나브로 내면화되는 것이라 봐요.

 

그런 일련의 내면화 과정이 가장 쉽고 빠르게 이뤄지는 공간이 바로 사교육이죠. 말하자면 서울대가 '서울대'인 것은 전국의 수 백, 수 천 개의 학원들이 미래세대인 아이들에게 그들의 위상을 자발적으로 홍보하고 팍팍 밀어주기 때문이라는 얘깁니다."

 

답변을 대신해, 이른바 SKY는 아니지만 '인 서울(In-Seoul) 대학'을 나온 그들에게 물었다. 너희들도 스스로를 '루저'라고 생각하는지를. 지금껏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 없었지만, 대학을 졸업하고도 번번이 취업에 실패하면서 집밖에 나가는 것조차 껄끄러울 정도로 초라함을 느꼈다고 한다. 그저 쓴 웃음 지으며 지금은 '루저' 맞단다.

 

고등학교 3년-대학교 4년, 그렇게 돈 쏟아붓고도 원하는 일 못해 

 

'루저' 둘과 술자리를 파하면서 그들을 바라보는 심정이 복잡해졌다. 비뚤어진 사회에 순치돼버린 그들이 한없이 밉다가도, 고단한 현실을 근근이 버티며 살아가는 모습에 가슴 아팠다. 그들도 고등학교 시절 청운의 꿈을 품었을 테고 나름 확고한 비전을 가지고 공부에 매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닥 오래 지나지도 않은 지금 마트 수보다도 많다는 보습 학원에서 '미래의 자신들'에게 영어, 수학을 가르치고 있다. 손에 돈 몇 푼 쥐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들이 지닌 잠재력과 대학 시절 갈고 닦았던 지식과 능력은 뭐가 되는가. 젊은 그들의 다양한 자질을 사장시키는 사회는 미래가 있을 수 없다.

 

그나저나, 고등학교 3년 동안 잠 못 자고 공부하고, 대학 4년 동안 수천 만 원이나 되는 등록금 내가며 죽어라 공부했는데도 원하는 일을 못하는 그들에게 1년 동안이나마 맡아 가르쳤던 교사로서 참 미안하다. 아니 죄책감마저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