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가장 인기 있는 여대생은 누구일까?' 하는 질문에 잠시 고민한 적이 있었다. 내 고민을 무색하게 한 정답은 '공대 다니는 여대생.'
이야기 둘
내가 다닌 지방의 사립 남고는 학교 전체를 통틀어 여성 한 분이 계셨으니, 미혼인 것도 모자라 미모까지 갖춘 독일어 선생님이셨다. 일찍이 공부와는 안녕을 고하고 점심시간을 제외하고는 또렷한 눈빛은커녕 매시간 졸음에 취해 사정없이 헤드뱅잉을 하던 친구들도 독일어 시간만은 눈망울이 초롱초롱했다.
영어사전은 없어도 독일어사전은 한 권씩 갖고 다니던 우리들에게 선생님의 사소한 행동 하나 하나는 커다란 관심사였다. 충격의 결혼소식을 발표해 우리를 낙담하게 하긴 했지만….
이야기 셋
요즘은 여군 학사장교도 뽑는다지만, 정말 훈련소에서는 여자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훈련소 마지막 즈음에 행군 나갔을 때 한 쪽에서 '여자다'라는 소리가 들렸다. 훈련병들은 빛의 속도로 고개를 소리 난 방향으로 일제히 돌렸다. 그 곳에는 한 할머니께서 묵묵히 밭일을 하고 계셨다.
'와, 남교사다!' 환호하다 이름만 남자란 말에 '급실망'
|
얼마 전 서울시교육청이 공개한 초등학교 여교사 비율이 91%에 이른다는 기사가 나왔다. 지금껏 절대 다수였던 내가 교직에서 소수인 남 교사가 된 지도 어느새 10년이 지나고 있다. 처음에 교직에 나왔을 때에 비해 서서히 남 교사의 수가 줄어들고 있음을 느낀다. 남교사가 천연기념물이라는 소리도 이젠 식상해서 쓰지 않는다. 당연한 소리가 되어 버리니 농담의 가치를 상실한 것이다. 실제로 학교에서는 보호하고 관리해야 하는 희귀종 대접을 받는 경우도 있다.
매년 2월 중순이 되어 선생님들의 전입, 전보 발령 명단이 발표되면 남교사가 오는지 안 오는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다. 가끔 남자가 온다고 해서 성대한 잔치라도 벌일 듯 축제분위기가 연출되다가 성함만 남자같은 분이라 학교 전체가 정적에 휩싸이기도 한다. 그 분들은 괜히 미안한 마음까지 안고 새로운 학교에 출근하게 된다.
반대로 여성스러운 이름으로 남고 시절 놀림감의 주인공이었을 법한 남자 선생님은 예상을 뒤엎는 반전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남자 선생님이 학교에 새로 부임하면 교장 선생님이 '능력자'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온다. 이런 몇몇 '능력자' 교장선생님이 계신 학교를 제외하고는 같은 학년에 남자는 혼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게 '나홀로' 남 선생님일 경우 부딪히는 일들을 몇 가지만 말해 보면 이렇다.
하나, 남자라면 당연히 할 수 있는 일들인데도 지나친 과찬을 받는 경우가 빈번한데 진짜로 잘해서 좋은 말씀을 해주시는 건지 남자니까 무조건 칭찬을 하시는 건지 구분이 잘 안 될 때가 잦다.
둘, 여자선생님 6~7분의 치열한 설전 속에 혼자 앉아있는 모습은 초등학교에 주로 있는 세종대왕 동상과 다를 게 없다. 공적인 협의회에서는 그나마 '내가 말을 잊지 않았어'라는 존재감을 느끼지만, 학년별 친목을 위한 자리에서 남교사는 자연스럽게 묵언수행의 경지에 들어서게 된다.
결혼을 안 한 후배 여선생님들이 현빈같은 스타일의 남자가 왜 자기 주변에 없느냐고 이야기할 때 주변에 있으면 상처만 받을 거라는 말을 하고 싶지만, 말문을 열고 묵언수행을 어기는 순간 친목은 반목이 되며 남교사는 공공의 적으로 장렬히 전사하게 된다.
셋, 결혼을 아직 못하고 있지만, 어느새 엽산이 기형아 예방을 위해 반드시 섭취해야 하는 것임을 알게 되고, 영어유치원은 어디가 좋으며 한달에 비용은 얼마나 드는지, 또 태권도학원은 어디가 괜찮은지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어머니들이 얼마나 자식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며 교육에 끊임없는 관심을 기울이는지도 절실히 느낀다.
이처럼, '나홀로' 남자로 일하다 보면 남자들이 알기 어려운 것을 많이 알아가긴 하지만, 어딘지 모를 허전함과 외로움이 느껴진다. 가끔은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는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한편 운동회나 고학년 생활지도 등 남교사로서의 업무가 많아 힘들어 한 적은 별로 없다. 최근엔 남교사가 적다보니 여교사들도 남자가 해야 할 일과 여자가 해야 할 일을 크게 구분하지 않는 분위기다.
공부만 한 교사 아닌 안목이 넓은 교사가 많아지길...
|
한편, 매년 새롭게 담임을 맡게 되면 반드시 물어보는 것이 있다. 남자담임을 처음 만나는 학생을 확인해 보는 것이다. 3분의 1 가까운 학생이 손을 들곤 한다. 그런 친구들은 꼼꼼하게 챙기지 않는 내 방식에 적응하지 못한다. 한동안 그런 내 방식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여자 선생님들의 꼼꼼하고 자세한 설명 방식을 부러워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나만의 장점을 살리려 노력한다. 매번 꼼꼼한 여선생님들과 지냈으니 1년 동안은 전혀 다른 스타일의 남 선생님을 만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라고 스스로 위안한다.
아이들은 모방을 통해 많은 것을 흡수한다. 나는 아이들이 좀더 다양한 선생님들을 만나기를 바란다. 나이가 많지만 항상 웃으며 인자하신 선생님, 꼼꼼하고 무서운 것 같지만 내 잘못된 습관을 고쳐주시는 선생님, 덤벙거리며 실수를 하지만 항상 웃겨주려고 노력하는 선생님…. 너무 모범적이고 공부 잘하는 것을 강조하는 선생님들만 계시는 건 아이들에게 편식을 하게 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끝으로 임용고시에 대해 한마디 할까 한다.
현재 교대에 재학하고 있는 밴드 동아리 후배들을 가끔 만난다. 요즘 교대 후배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연예인 부럽지 않은 패션 감각에 창의적인 발상을 즐기며 대학생활의 멋진 추억을 만들어가고 있다. 공연 준비에 모든 것을 바치는 후배들을 보며 왜 그들처럼 오늘을 불태워가며 살아가지 못하는지 아쉬워하며 나를 되돌아보기도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번에 졸업하는 후배들 중에 열심히 동아리 활동을 한 후배들의 임용고시 합격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분명 그들에게 교직이 주어진다면 아이들이 지금까지 맛보지 못한 또다른 행복과 미래를 보여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미 교대는 임용고시 합격을 위해 대학생활을 포기해야 하는 전쟁터가 되어 가고 있다. 임용고시에서 교대 재학중의 다양한 활동은 전혀 평가되지 않는 것이다.
여전히 모범적이고 학업능력이 우수한 교사만을 선발하려 하는데 암기위주의 임용고시만으로 '암기의 달인'을 뽑으려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이보다는 대학생활을 통해 다양한 경험을 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을 넓혀, 아이들과 그런 경험과 고민들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교사가 많아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