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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나쁜 교사입니다

리첫 2011. 6. 14. 16:34

"선생님, 선생님이 저를 흔드시면 어떡해요, 네?"

 

야간자율학습시간 내내 괴롭도록 고민한 흔적이 역력한 S가 저를 찾아와 처음 내뱉은 말은 이거였습니다.

 

S의 담임인 동시에 사회과 담당인 저는, 며칠 전 S를 비롯한 몇 명에게 모의재판 대본 하나를 건네주며 "법무부 주최로 전국고교생모의재판 대회가 열리는데, 거기 이 대본을 제출해보자"고 말했습니다. 아이들은 당황했습니다. 20페이지에 달하는 대본은 한눈에도 '완벽'했으니 그랬습니다. 대본은 저와 법조인의 손을 거친 것이니 아이들 수준으로는 도저히 만들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습니다. 누군가 물었습니다.

 

"이거 정말 훌륭하긴 한데요. 저희가 한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제출해도 돼요?"

"고등학생들이 모의재판 대본을 쓴다는 거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야. 실제로 이 대회에서 상을 타는 학교들은 대부분 특목고이고, 출전팀의 대본들은 다 변호사들의 손을 거친 것들이야. 학생들이 직접 쓴다고 해도 법 전문가의 도움 없이는 그 형식조차 맞출 수가 없어."

 

그래도 당혹감을 지우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저는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내신관리에 수능준비에 논술 준비, 텝스 점수 관리만으로도 벅찬 너희야. 시간을 쪼개고 쪼개도 모자란데 어떻게 그 대회를 위해 몇 주, 또는 몇 달을 투자해서 대본을 쓸 수 있겠니? 다행히 선생님한테 좋은 게 있어. 그러니까 이걸로 예선에 제출해보고 만일 통과하면 본선 때 너희가 쓴 척 시연을 하면 돼."

 

너무나 현실적인, 아니 너무나 '대입 중심적으로 아이들을 배려한' 저의 설명에 아이들 대부분이 고개를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니, '선생님 정말 감사해요!' 하는 감탄과 함께 얼굴 가득 웃음을 보였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아이들이 쓰지 않은 아이들의 대본을 제출하는 일뿐이었습니다.

 

  
대법원.
ⓒ 김용국
대법원

그런데 오늘 갑자기 S가 달려온 겁니다.

 

"선생님 마음 이해해요. 또 감사해요. 우리들 공부 시간 뺏기지 않으면서 대학 수시 전형에 도움될 스펙 마련할 수 있게 도와주시려는 거 알아요. 하지만 그런 식으로 상을 타면 뭐하고 그런 식으로 좋은 대학 가면 뭐하겠어요? 그 대회에서 상을 타면 로스쿨 지원시 가산점 준다지만 그런 식으로 가산점 얻어서 로스쿨 가면 또 뭐하겠어요?

 

그런 식으로 성공하고 싶지 않아요. 아시잖아요. 제 꿈이 검사인 거. 저는 우리 사회에 정의를 세우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런데 그 과정이 이렇게 정의롭지 못하다면 제가 도대체 나중에 뭘 할 수 있겠어요?"

 

순간, 한 대 얻어맞은 듯 멍해졌습니다. 구절구절 올바른 문장들 뒤에 남은 '정의'라는 두 글자. 그 속에서 제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습니다. 물론 저는 변명하고 싶었습니다. 정말이지 그 아이를 잡고서 조금만 비겁해질 필요가 있다고 설득하고도 싶었습니다. 그건 그때의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진짜 날로 먹었어, '판사 엄마'가 짱이라니까"

 

몇 해 전 처음으로 이 대회를 위해 아이들을 준비시킨 적이 있습니다. <법과 사회>라는 법 교과를 담당하고 있지만 법조인에 비해 저의 전문성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래도 아이들과 저는 머리를 쥐어짜냈고 여름방학을 모조리 투자해 아마추어 모의재판 대본을 작성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대본은 운좋게도 예선을 통과해 본선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본선에서 벌어졌습니다. 특목고인 한 학교. 아무리 객관적으로 본대도 어설프고 무성의한 그 학교의 모의재판 시연이 끝났을 때 심사위원들 중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대부분이 '질문할 것이 없을만큼 완벽하다'고 평했을 뿐이고, 유일하게 질문을 한 심사위원인 K 법무법인의 한 변호사는, '정말 대단하다. 이걸 정말 학생들이 직접 작성했느냐'고 물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판사 역할의 학생은 대답했습니다.

 

"직접 서울대 도서관에서 제3자 채권 관련 논문을 뒤져 관련 내용을 분석했습니다." 

 

법 교과를 담당하고 있음에도, 저는 '제3자 채권'이란 용어를 그때 처음으로 들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고등학생들이 생각해낼 수 없는 종류의 법 개념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 화장실을 다녀온 우리 학교 아이들이 빳빳하게 굳은 얼굴로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며 저에게 기막힌 소식을 전했습니다.

 

화장실 한 켠에서 그 학교의 아이들이 모여서 "니네 엄마한테 감사하다고 꼭 말씀드려줘. 우리 진짜 날로 먹었어", "진짜 판사 엄마가 짱이라니까"라는 얘기들을 하더라는 겁니다. 순간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설마 하며 아이들을 달랬습니다. 하지만 다른 학교들에 비해 가장 미완성된 시연을 한 그 학교가 2등을 하면서 저는 의혹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법무부 사이트에서 그 학교의 대본을 다운받던 저는 정말이지 분노에 휩싸이고 말았습니다. 우연히 대본 파일에 마우스를 갖다댔을 때 파일 정보가 나타났는데, 그 정보에는 '△△대학 로스쿨 ○○○ 교수'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판사 엄마'에 이어 '로스쿨 교수'라니, 이건 대체 뭘까 어지럽던 그 즈음, 저는 지인을 통해 알게 됐습니다. 그날 모의재판 시연 때 판사 역할을 맡았던 아이가 두 분의 딸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모의재판 대회 자체를 비난할 수 있을까요? 법조인을 희망하는 아이들의 꿈의 경연장이자 아이들의 논리적 사고력과 토론 능력을 한층 높일 수 있는 이 대회는 정말이지 좋은 대회입니다. 하지만 법무부장관상이 걸린 이런 대회에서의 성과가 고스란히 대학 입시와 연결되는 현실 속에서 대회는 이미 아이들만의 경연이 아니게 된 것입니다.

 

'판사 엄마'와 '로스쿨 교수 아빠'가 정말 아이의 대본 작성에 도움을 주었는지 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뒤이어 들려온, 아예 돈을 주고 변호사를 고용해서 대본을 작성했다는 또 다른 학교의 얘기는 저에게 '깨달음'을 주고 말았습니다. '어차피 다 이런 식일지 모른다'라는, '우리만 정정당당하다고 얻어지는 것이 없다'라는, '그러면 우리만 손해다'라는.

 

그 깨달음 속에서 저는 급기야 '학생들을 위해서'라며 아이들의 땀이 한 방울도 배어 있지 않은 대본을 제출할 것을 권유한 겁니다.

 

얼굴이 붉어지고...저는 고개마저 떨구고 말았습니다

 

  
입학사정관과 수시모집에 대한 각종 홍보자료들. 한 명이라도 먼저 선점하기 위한 대학의 경쟁은 치열하고 학생들은 고민이다.
ⓒ 김행수
수시모집

"기억나세요? <삼성을 말한다>를 읽고 나서 우리 법조계가 너무도 썩어 있는 거 같은데 이런 상황에서 제가 소신 있고 정의로운 검사가 될 수 있겠냐고, 올라가는 과정에서 저도 물이 들고 저도 변해버리지 않겠느냐고 물었을 때 선생님이 그러셨잖아요. 넌 분명히 그럴 수 있다고. 넌 분명히 너를 지킬 수 있을꺼라고. 그리고…."

 

"……."

 

"그리고 또 그러셨잖아요. '니가 흔들릴 때면 언제든 날 찾아와. 그럼 내가, 여기 이 교실에서 니가 꿈꾸던 너를 떠올리게 해줄게'라고. 그런데 선생님, 선생님이 저를 흔드시면 어떡해요, 네?"

 

이미 얼굴이 붉어진 저는, 이제 고개마저 떨구고 말았습니다. 여느 때와 달리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쉼 없이 말을 쏟아내는 S와 눈을 마주칠 용기조차 잃고 말았습니다. 세상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너희도 공정하지 못한 방법으로 세상과 싸워나가라고 가르쳐서는 안 되는 것인데… 정말 그런 것인데 나는 대체 어쩌자고….

 

교과부가 만들어낸 입학사정관제는 사실 더없이 좋은 제도입니다. 점수가 아닌 사람을 보고, 현재가 아닌 가능성을 보자는 그 취지는 수능 시험 점수에만 목을 매야 하는 우리 교육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입니다. 하지만 역시 학벌위주 사회가 지속되는 한 교과부가 어떤 좋은 대안을 만들어낸다 해도 본질은 왜곡될 수밖에 없는 걸까요?

 

교과부의 취지와 달리 입학사정관제는 우리 아이들을 오히려 더 힘들게 만들고 있습니다. 고등학생이 텝스 900점을 따기 위해 정기적으로 시험을 보고, 경시대회 수상을 위해 경제원론이나 법학개론 따위를 공부하고, 방학이면 개발도상국에 나가 '사랑의 집 짓기'를 하고.

 

이런 식의 대입 준비는 이제 '수능-내신-논술'이라는 죽음의 피라미드를, '수능-내신-논술-스펙'이라는 죽음의 다이아몬드로 바꾸고 있습니다(물론 교과부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고교 생활기록부에 외국어 공인점수나 외부 수상 기록을 일체 기록하지 못하게 하고 있지만, 대학들은 '기타 서류'를 받음으로써 학생들의 스펙을 모조리 평가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수시 전형이나 입학사정관제는 아이들에게 부담이 되는 것 이상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텝스를 공부해본 이들은 알 겁니다. 텝스는 절대 학교 교육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따로 학원이라도 다니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아니, 초중학교 때부터 (외국에서 연수를 받으면 더 좋고) 준비하지 않으면 고등학교 때 텝스 900점이 나올 수는 없습니다.

 

또 법무부나 지식경제부 등에서 개최하는 각종 경시대회 수상도 학생들의 '자기주도적 학습'만으로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꼭 학원이 아니더라도 누군가의 도움이 없다면 불가능한 것이 사실입니다.

 

세계화, 정보화 사회에서 암기력보다 중요한 것은 세계인과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외국어 능력이요, 다양한 경험을 통해 길러지는 창의력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그런 능력을 파악하는 데 수능보다 입학사정관제가 더 적합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과도한 부담이 될 뿐 아니라, '소득격차가 고스란히 교육격차로 이어지게 하는 장치'로 기능하는 측면이 있기에 저는 지금의 입시제도가 정말이지 걱정스럽습니다.

 

그리고… 오늘 S의 앞에서 온통 얼굴이 붉어졌던 저처럼, 그릇된 방법으로 어떻게든 아이들의 스펙을 만들어주려는 교사나 학부모님들이 늘어나지 않을까 또 걱정스럽습니다.

 

S에게 한 대 얻어맞은 저는, 아이들의 땀이 배이지 않은 그 대본을 법무부 대회에 제출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도 아이들의 공인 점수와 경시대회 수상 등 스펙을 관리하는 일은 계속해야 합니다. 어쨌든 지금의 대학들은 스펙을 원하니까요.

 

그런데 과연 우리 아이들이, 자신들의 힘만으로, 그러니까 '자기주도적 학습'만으로 대학이 원하는 스펙들을 충분히 쌓을 수 있을지, 내가 정말 '쉽고 빠른 길'로 안내하지 않아도 되는 것인지, S의 외침을 듣고 난 지금도 저는 자꾸만 흔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