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상'의 정치경제학
'무상(無償)' 시리즈가 유행이다. 무상복지, 무상급식, 무상의료, 무상교육 등등. 이 무상에 대한 사회 내의 감상법도 각각이다. 무상은 공짜를 말하며 이는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이득을 취하려는 불건전한 행위이며 심지어는 후안무치한 망국적 근성이라고 몰아대는가 하면, 무상은 보편적 복지의 가장 파격적인 형태이지만 후진적인 복지와 국민위기의 실상을 감안했을 때 가장 적극적인 급여 제공 방식이라고 옹호하기도 한다.
"공짜점심은 없다"는 말은 전자의 견해를 대변하는 가장 핵심적인 명제이다. 그 연원은 이렇다. 미국 서부의 한 선술집에서 술을 일정량 이상 마시는 단골손님에게는 점심을 공짜로 대접하였단다. 손님들은 너무 흡족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경제학의 거두(巨頭) 폴 사무엘슨(P. Samuelson)은 이에 대해 그 본질을 정확히 밝히는 명제로서 위와 같이 표현했고 이후 이는 경제학자들에게서 정부의 지출에 반드시 국민의 부담이 요구된다는 본질을 알리는 유명한 명제가 되었다.
합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결국 선술집에서 받은 공짜 점심은 이미 자신이 지불한 엄청난 술값에 충분히 지불된 것에 기인하는 것이어서 결국 대가를 치르지 않고 그냥 주어지는 것은 없다. 맞는 말이다. 특히 국가로부터 무엇을 얻는다는 것은 어디에선가 납세자의 부담이 있었기에 가능하다는 말은 새로울 것 없는 상식에 속한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이 말을 뒤집어 보면 새로운 해석도 가능하다. 이미 과도할만큼 지불했음에도 그 흔한 공짜점심으로 선심 한번 쓰지 않는 맹랑한 상인을 본다면? 정부에 대해 세 부담을 했음에도 직접적인 소득보전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엉뚱한 지출로 뿌려지고 만다면?
이제 대한민국의 현실로 돌아와 보자. 대한민국의 국민들과 기업들이 세금 및 사회보장기여금의 형태로 정부 및 공공기관에 갹출 당하는 정도는 GDP의 사분의 일에 해당한다(2009년 현재 25.6%). 그러나 OECD 국가 중 스웨덴과 같은 나라는 거의 이분의 일에 해당한다. 너무 과한 비유라면 우리와 경제규모가 비슷한 국가들을 상대로 비교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가?
시민경제사회연구소의 홍헌호박사의 추정에 따르면, 아래 표와 같이 2009년 현재 OECD의 33개 회원국 중에서 경제수준이 비슷한 11개국(한국 포함)의 평균 국민부담률은 GDP 대비 29.8%로 25.6%인 우리보다 4.2% 포인트 높고, 공공복지지출 비율은 GDP 대비 15.6%로 7.5%인 우리보다 8.1% 포인트 높다.
이를 현재 대한민국 GDP 규모(2011 경상GDP 1162조원)에 적용하면 우리 국민들은 경제수준이 비슷한 12개국들보다 49조원 세금을 덜 내고 있으며, 또 다른 한편에서는 94조원에 달하는 복지혜택을 누리지 못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경제수준이 비슷한 OECD 국가들 평균치와 비교해 보더라도 대한민국이 경제수준에 맞는 복지국가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94조에 달하는 공공복지 지출의 확대가 가능하며, 부담하지 않은 49조원을 제한다면 45조원에 대한 복지지출이 행해지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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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대한민국 국민은 적어도 복지부문에 있어 공짜점심을 먹을 이유가 충분하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결국은 대한민국 정부가 국민의 세금으로 온통 길바닥에, 강바닥에, 호화청사에, 분양장사용 아파트에 쏟아 붓느라 국민들의 가계에서 주름살을 깊게 파고 있는 교육비, 의료비, 어린이집 보육비, 주택부금 등등에 보탬이 되는 역할을 외면하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의 정치인들, 관료들, 그리고 지식인들 일부는 국민에게 공짜점심은 부도덕하다고 설파한다. 세금을 더 내게 될 것이라고 한다. 급기야 경제가, 국가가 망하는 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공짜점심이 아니라 이미 내가 충분히 대가를 낸 것이므로 당당하게 향유할 권리라고. 경제개발기구 국가들의 평균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복지지출이 적다고, 아니 비슷한 경제력 규모의 국가들에 비해 아직도 100조원 가까이를 덜 받고 있다고, 그리고 복지 때문에 거덜 난 국가는 없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지금까지 이들의 맹목적이고 일면적인 거짓된 신념에 의해 복지 없는 경제성장에만 매진한 결과, 우리사회는 오로지 '정글의 법칙'만이 지배한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경쟁, 세상 풍파에 대해 홀로이 대처해 나가는 정글북 사나이, 패자 부활이 없는 승자독식의 사회가 그 결과다.
그러나 복지와 함께 성장하는 길을 달려온 선진 복지국가들은 정글을 공원으로 바꾸어 놓았다. 누구나가 안심하고 다닐 수 있도록 가시덤불을 없애고 죽음의 늪을 치워 버렸다. 정글의 비극을 맛본 국민들은 '모두'의 공원을 위해 자신의 능력에 비례하여 세금을 냈고 그 결과를 함께 향유하게 되었다. 한국사회에서 지금 불고 있는 무상복지, 보편적 복지에 대한 열망은 우리 사회를 정글에서 관리된 공원으로 바꾸자는 열망에 다름 아니다.
II. 무상급식 논란의 감상법
무상급식 주민투표가 점입가경이 되고 있다. 오세훈 시장이 마침내 시장직까지 거는 통큰(?)판을 만들어 버렸다. 사실 무상급식에 대한 논란은 무상급식 그 자체와 오세훈 시장이 언급한 대로 '복지포퓰리즘'의 확대 가능성이란 측면에서 각기 논의해 볼 수 있다.
우선 무상급식 자체에 대해 논해보기로 하자. 사실 이 문제는 정책 집행의 우선순위와 기술적인 집행 효과성, 재정 확보 가능성의 판단에 관한 문제다. 아주 단순화시키면 서울의 초중등학생들 모두에게 급식을 제공하는 것이 얼마나 시급한 사안이며 어느 정도 범주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효과적이며, 서울시 교육청과 서울시가 2000억에 이르는 급식재원을 마련하는 것이 가능한가의 문제이다.
물론 이에 대한 결론의 도출 또한 모두가 합의에 도달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급작스럽게 등장한 결식아동의 문제와 이미 전국적으로 80만명에 이르렀던 급식지원 학생의 규모, 부분 급식을 둘러싸고 일선 현장에서 벌어지는 반교육적인 부작용의 문제들을 고려하면, 비록 세계에서 핀란드와 스웨덴만 무상급식을 하고 있다손 치더라도 우리나라가 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더군다나 오세훈시장이 주민투표에 부의한 방식대로 하위 50% 계층에 대해서만 무상급식을 실시하는 것은 행정적인 비용의 유발 정도가 우심한 면이 있다. 50% 지점을 끊어내려면 거의 대다수 학부형의 소득을 공적으로 추적하여 일렬로 세우는 거대한 작업을 해야 하며, 그 결과로 끊어내는 50% 선에 대해 경계선상에 있는 이들의 동의 여부를 획득하는 작업은 지난한 행정비용을 유발할 것이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의 소득파악률의 낮은 수준과 상대적 박탈감의 팽배라는 현실을 고려할 때 이제 부모와 아동을 정확히 반으로 나누어 평균이하 계층과 평균이상 계층이란 확실한 분류를 행하기 때문에 국민들의 위화감이나 열패감은 숨길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부작용을 없애기 위해 서울시가 부담해야 하는 재정의 정도는 전체 서울시 재정의 0.3%에 해당한다는 측면에서 재정동원이 불가능하지도 않다는 측면에서 보면 적어도 이 문제 자체는 180억 원이란 물리적 비용과 엄청난 그 이상의 기회비용을 지불하여 주민투표를 할 사안은 결코 아니라는 판단이 든다.
그렇다면, 오세훈시장이 내건 두 번째 이유, 이것이 보편적 복지라는 복지포퓰리즘의 시작이며 이를 저지하고 재정파탄으로부터 구하는 성전(聖戰)이라는 측면은 어떠한가? 이는 이미 앞 장에서 본 것처럼 한국의 복지현실에 대한 무지함을 넘어 한국 국민들의 고통의 현주소를 외면한 사고의 결과라는 점에서 처연한 심정을 금할 수 없다. 보편적 복지는 결코 국가부도의 원흉이자 포퓰리즘의 대상으로 폄하될 수 없는, 인류가 20세기에 안착시켜 놓은 복지국가라는 국가운영질서의 매우 중요한 기조에 해당한다. 더군다나 보편적 복지가 무조건적인 퍼주기 복지이고 무상복지인 것만도 아니다.
보편적 복지에 대한 정의부터 하자. 유명한 닐 길버트(Neil. Gilbert)에 따르면 이는 "경제적 무능력 여부를 따지지 않고 급여를 받을 권리를 인정하는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이것과 대비되는 개념은 물론 선별적 복지이지만 모든 복지제공의 형태가 두 가지 만으로 분류되지는 않는다. 중간의 모호한 영역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보편적 복지에 대해 세인들이 갖기 쉬운 첫 번째 오류다. 즉, 보훈처럼 사회적으로 보상해야 하는 경우는? 전문가의 판단에 따라 욕구가 있는지를 진단해야 하는 경우는? 경제적 능력을 조사하되 소득에 따라 차등적으로 급여수준을 결정하는 경우는? 상위 10~20%만을 제외하고 나머지를 다 주는 경우는? 이 모든 것들이 보편적 복지인지 선별적 복지인지를 정확히 가를 수 없는 경우다. 따라서 극단적인 양극단이 있고 나머지는 그 사이 연속선상의 어느 지점에 있을 뿐이며 상대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보편적 복지는 모든 것을 공짜로 누구나에게 주자는 것인가? 이 부분에서 두 번째 오류가 있다. 보편적 복지의 전형이 사회보험인데, 건강보험, 국민연금 등이 그 예이다. 더 나아가 아동수당, 무상의료, 무상급식 등이 그 예인데 보험료나 조세로 이미 상당한 기여를 행한 대가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보편적 복지는 결코 '공짜 점심'을 주자는 것이 아니라 상당 정도 평상시의 기여를 전제로 설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보편적 복지란 모든 부문을 그렇게 하자는 것인가? 여기에 세 번째 오류가 스며들 수 있다. 어느 선진복지국가도 결코 모든 복지제도를 보편적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그 시대, 그 사회에서 어떤 기본적인 욕구가 가장 긴요하고 완벽하게 해결될 필요가 있는지를 따져서 사회적 합의를 거쳐 핵심적인 영역을 보편적 복지로 해결할 뿐이다. 2차세계대전 직후 영국은 무상의료를 택했고, 1950년대 스웨덴은 아동수당을, 1980년대 핀란드는 무상교육을 대표적인 보편적 복지정책으로 삼았을 뿐이다.
이런 오류를 제거하고 나면 보편적 복지란 한 나라의 정책 구현상의 '기조'이며 '경향성'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사회에서 현재 왜 이런 기조와 경향성이 요구되는가? 지금까지 경제성장 제일주의와 선별적 복지를 기조로 삼아 달려온 한국사회가 현재 드러난 사회적 난맥상, 즉 사회양극화, 저출산, 고령화, 중산층의 와해, 빈곤여성·빈곤아동·빈곤노인·빈곤장애인의 대규모 존재, 인적자본의 훼손, 성장동력의 쇄잔 등등의 문제가 심화되어왔다는 인식에서 시작된다. 이 문제를 경제성장과 선별적 복지로 해결하자는 것은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을 문제의 해결자로 내세우는 꼴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보편적 복지를 망국적 포퓰리즘이라 말하는 것 자체가 더 포퓰리즘에 해당한다. 애초 보편적 복지가 갖고 있는 개념의 다양성과 정책의 경향성으로서의 의미를 부정하고 "부자에게 줄 필요가 없다"는 식의 경박한 개념과 경직된 정책으로 논쟁을 몰아가기 때문이다. 무상급식을 '보편적 복지 쓰나미'의 전초전으로 보는 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 알게 해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III. 무상급식 논쟁을 넘어 '진정한' 무상보육으로
어쨌든 무상급식 논란은 24일 서울시 주민투표에 의해 어느 정도는 가닥을 잡을 일이다. 그렇지만 무상복지 시리즈의 또 다른 국면은 무상보육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이 부분은 다 같은 무상임에도 무상급식과는 달리 커다란 사회적 쟁점사항으로 부각되지 않고 있다. 오로지 한나라당 내부에서만 찻잔속의 태풍처럼 이야기될 뿐.
그 이유는 자명하다. 알다시피, 무상으로 보육서비스를 이용케하자는 결단은 무상을 '복지포퓰리즘'으로 스스로 규정한 여권과 보수층으로부터 행해졌다. 이미 이명박 대통령은 2012년부터 만5세아에 대한 무상보육 및 무상유아교육 실시를 선언한바 있다. 사실 그것이 2011년 4월 27일 재보선에서 여권이 타격을 받은 뒤 나온 터라 정치적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받았었지만 어차피 민주당을 비롯한 야권 및 진보복지진영에서 주창하던 것이었기에 논란의 대상일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5세아에 대한 무상보육은 이미 이명박정부에서 아래 표와 같이 아이사랑플랜에 의해 발표한 내용을 실천에 옮긴다는 점에서 커다란 쟁점 사항이 아닐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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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한나라당의 원내대표인 황우여 의원이 0세아 무상보육을 천명하는 등 무상보육의 연령 범위는 5세아에서부터 더욱 확대되는 경로를 거치는 것이 어렵지 않게 예견된다. 그러나 무상보육은 무상급식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매우 커다란 논쟁 사항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 무풍지대로 넘어가고 있는 분위기는 상당히 유감스럽다. 무상보육에 있어서 논쟁의 핵심은 '무상보육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사실 현재의 무상보육은 공식적으로 책정된 보육료에 대한 지원으로만 국한되어 이야기되고 있다. 그러나 보육서비스의 수요자 입장에서 보면, 실제적으로 어린이집을 통한 보육서비스 이용에 들어가는 전 비용이 보육료에 해당하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실제적인 보육비용 전체에 대한 지원이 아닌 공식적인 보육료에 대한 지원을 무상보육이라 한다면, 이는 현재 학교교육에서 공교육비용은 무료지만 사교육비 수준이 훨씬 부풀려져 실질적으로 무상교육의 의미가 훼손되는 상황과 똑같은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한 예를 들어보자. 아래의 표는 서울시에 위치한 한 어린이집의 보육비 사례다. 서울시가 정한 보육료 수납 월 한도액은 231,000원이지만 활동비로 4만원, 특별활동비로 18만5천원, 총 22만5천원을 더 납부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어린이집이 특기활동비를 명목으로 받아서는 안 되는 비용을 받고 있는 것이다. 민간어린이집 입장에서는 정부가 정해주는 보육비만으로는 인건비나 시설비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특기활동이라는 부가적인 수입을 창출하려고 하고, 부모들은 아이에게 특기활동이 필요한지를 따지기 보다는 아이가 특기활동을 하지 않으면 다른 연령대의 아이들과 함께 보육을 받아야 하니, 방치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에 특기활동을 시키고 있는 실정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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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보육정책에서 이 부분을 도외시하는 것은 핵심을 빠뜨리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위한 제어장치를 수용할 것인지에 대한 입장을 밝히지 않는 무상보육 주장은 거의 공허하기까지 하며, 심지어는 대중을 기만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제어장치란 무엇인가?
핵심은, 믿고 맡길 수 있는 국공립보육시설의 비중을 30%까지 확대하여 민간 어린이집에서의 실질비용 인상 유인을 억제하는 장치를 강구하는 것이다. 당연히 국가는 보육에 대한 권리를 보장할 수 있도록 적절한 국공립보육시설을 우선적으로 설치해야 한다. 2006년 정부와 여성계, 재계, 노동계, 종교계 등이 체결한 저출산·고령화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협약은 보육시설 이용 아동 수 대비 30%까지 국공립시설을 확충할 것을 명시하였고, 정부는 같은 해 '1차 중장기보육계획(새싹플랜)'을 통해 국공립보육시설을 2010년까지 2,700개로 확충하겠다는 계획을 마련해 사회협약의 국공립보육시설 확충 목표를 달성하겠다고 밝힌 바 있으나 이명박정부는 새싹플랜을 수정하면서 국공립보육시설 확충 계획을 대폭 축소했음을 생각할 때 이 부분에 대한 정부와 정권의 의지를 끌어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를 위해 보육비 부담 상한제 도입이 적극 검토되어야 한다. 국공립어린이집 등 정부지원시설이 고시된 보육료만으로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이유는 시설 설립비가 보육료에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현재 민간시설들은 이 비용을 특기활동비로 보호자에게 전가하고 있다. 종일반 기준으로 고시되어 있는 보육료를 마치 반일반 비용인 것처럼 하고 오후에는 특기활동이라고 해서 별도의 비용을 추가해서 받고 있기도 하다.
원론적으로는 민간보육시설이 국공립보육시설처럼 정부 고시 보육료만으로 운영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시설비나 인건비 지원이 필요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민간보육시설이 국공립시설에 준하는 정부의 관리감독을 받고, 더불어 시설이 영리가 아닌 비영리기관으로서 서비스의 공공성이 보장되도록 하는 것이 전제 되어야 한다. 보육서비스는 필요로 하는 모든 아동과 보호자가 권리로서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로 재정립되어야 한다.
따라서 보육시설의 설치와 보육료 부담도 이러한 관점에서 재해석되어야 하며, 보육비에 있어서 국가와 부모가 부담하는 수준이 어느 정도가 되어야 하는 지에 대해 목표치를 정하고, 부모들이 일정 정도만 부담하면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아이들을 맡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는 보육서비스의 비용부담에 있어서도 서비스 이용의 대가가 아닌 사회책임과 연대의 원리에 따라 소득 수준에 따른 비용의 부담으로 전환될 필요도 심각히 고려해 보아야 한다. 앞에서 말한대로 보편적 복지의 핵심이 무조건 무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신중하게 다양한 정책대안들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제 결론을 내도록 해보자. 지금 보편적 복지의 오해와 왜곡으로 진행되고 있는 무상급식에 대한 과열된 논의가 어떤 식으로든 해결되고 진정된다면, 복지권의 보편적 권리를 향유하는 원칙을 정하면서도 급여와 부담의 합리적 조화 원칙이 무엇인지 차분하게 논의하는 국면이 필요하다. 즉, 복지국가는 복지에 대한 보편적 권리의식을 기조로 하되, 그 구현방법은 매우 다양하다는 또 다른 진실을 우리 사회가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 코리아연구원 특별기획35-2호입니다. 코리아연구원 홈페이지(www.knsi.org)에서 원문 및 풍부한 참고자료를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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