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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필선언이 호사스런 이유

리첫 2012. 9. 28. 09:39

알려진 출생연도가 맞다면 나와는 동갑내기(1959년생)인 언론인 고종석 씨가 돌연 ‘절필’을 선언했다. ‘절필(絶筆)’이란 문사(文士)가 글쓰기를 중단한다는 뜻이다. 요즘 세태로 치자면 그리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지만(요새는 ‘절키(절key)’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요즘도 이 말은 별 오해 없이 통용되고 있다.

그는 그간 맡아온 <한겨레> ‘고종석칼럼’의 24일자 기고에서 자신의 글쓰기의 한계(혹은 무료함)를 토로한 후 “직업적 글쓰기를 접는다. 언젠가 되돌아올 수도 있겠지만, 일단 접는다.”고 밝혔다. 다시 글쓰기를 할 가능성에 대해 여운을 남기긴 했지만 일단은 접는단다. 그리고는 그는 글에서 자신이 ‘절필’에 이르게 된 그간의 경위를 솔직히 털어놨다. 그 속사정은 다음과 같다.

“내가 글쟁이로서, 다시 말해 얼치기 기자이자 얼치기 소설가이자 얼치기 언어학자로서 독자들에게 끼친 영향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소수의 독자들이 내 글에 호의적이긴 했지만, 내 책이 독자들에게 큰 메아리를 불러일으켜 많이 팔려나간 적은 없다. 설령 내 책이 꽤 팔려나가고 운 좋게 거기 권위가 곁들여졌다 해서, 그것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분단체제 극복을 위해 그리도 많은 글을 쓴 백낙청이 통일부 중하급 관료나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소속 국회의원의 보좌관만큼이라도 대한민국의 통일정책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미심쩍었다. 글은, 예외적 경우가 있긴 하겠으나, 세상을 바꾸는 데 무력해 보였다. 달포 전쯤, 술자리에서 친구 차병직이 자조적으로 “책은 안철수 같은 사람이나 쓰는 거야! 우린 아니지!”라고 말했을 때, 나는 진지하게 절필을 생각했다.”


그는 80년대 중반 이후부터 20여년간 여러 매체에서 기자로 활동해왔고, 또 그간 여러 권의 흥미로운 책도 펴냈다. 그런 그가 “(글로는)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고 판단해 절필한 대목에서 그와 비슷한 여정을 지나온 나는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 아니 절망감을 넘어 회의감이 들기조차 했다. (그런 뜻에서 그날 늦은밤 나는 페이스북에 그의 절필을 아쉬워하는 글을 한 줄 올린 바 있다)

모든 기자, 모든 작가, 합쳐서 세상의 모든 ‘글쟁이’가 세상을 바꿔보자고 글을 쓰는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그런 생각조차 없다면 그건 글쟁이가 아니다. 수백만부가 나가는 중앙일간지 기자든, 겨우 수백명의 사원들이 보는 중소기업의 사보 기자든 ‘기자’라는 직함을 가진 사람들은 가슴 한 구석에 글쟁이로서의 자존감과 사명감이라는 게 있다. 이건 유명하건, 무명이건 작가들도 아마 비슷하리라.

직업으로서의 글쓰기든, 운동(movement)로서의 글쓰기든 글은 그 사람의 인격이 형상화된 결과물이다. 이왕이면 밀리언셀러면 더 좋겠지만 비록 수백, 수천명이 읽는다 해도 그 글(혹은 책)은 타자에게 어떤 형태로든 기억되고 또 영향을 끼친다. 사람들은 흔히 김훈의 작품 가운데 베스트셀러 <칼의 노래>나 <남한산성>을 기억하기 쉽겠지만 김훈 문체의 상징물과도 같은 <풍경과 상처>를 기억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기자이자 언어학자, 칼럼니스트, 에세이스트, 소설가 등으로도 불리는 고종석은 참 독특한 책을 여럿 썼다. 특히 그는 우리 모국어에 대한 탐구가 이채롭고 값지다 하겠다. 출간 순서에 관계없이 그 가운데 몇을 나열하자면, <말들의 풍경>, <감염된 언어>, <모국어의 속살>, 그리고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과 속편격인 <어루만지다>, <국어의 풍경들> 등이 그것이다. (이밖에도 그는 시평(時評), 소설 등 이래저래 20여 권의 책을 썼다.)

<서얼단상> 표지

그러나 그의 책 가운데서 내가 흥미롭게 읽은 것은 2010년 개마고원에서 출간한 <서얼단상>이다. 이 책은 부제에서 밝혔듯이 ‘전라도 사람’(그는 전남 여수생)의 세상읽기다. ‘서얼(庶孼)’이란 서자(평민 첩의 자손)와 얼자(천민 첩의 자손)에서 따온 말로, 비장애인이 다수인 사회의 장애인, 남성중심 사회의 여성, 영호남 지역차별이 엄존하는 한국사회에서는 전라도 사람을 지칭한다. 이 사회의 소수자를 ‘서얼’로 상징한 그의 탁견에 나는 무릎을 쳤다.

그런데 그는 “내가 글쟁이로서, 다시 말해 얼치기 기자이자 얼치기 소설가이자 얼치기 언어학자로서 독자들에게 끼친 영향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소수의 독자들이 내 글에 호의적이긴 했지만, 내 책이 독자들에게 큰 메아리를 불러일으켜 많이 팔려나간 적은 없다.”며 “설령 내 책이 꽤 팔려나가고 운 좋게 거기 권위가 곁들여졌다 해서, 그것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고 결론 내렸다. 나처럼 그의 책이 울린 ‘메아리’를 들은 독자가 엄연히 있는데도 말이다.

굳이 그의 ‘결론’을 부인하려 할 것은 없겠지만 이것 하나만은 ‘반론’이 필요해 보인다. 그가 언급한 ‘메아리’는 울림, 즉 타자화(他者化) 된 것을 말한다는 점이다. 즉, 내가 이쪽 산꼭대기에서 저쪽 산을 향해 야호! 하고 외칠 때 맞은편 산에서 야호! 하고 반사되어 되돌아오는 것이 메아리다. 따라서 ‘메아리’는 나에게서 비롯한 것이긴 하지만 ‘내 것’이 아니다. 맞은편 산, 즉 글이나 책으로 치면 ‘독자’의 몫인 셈이다. 그 메아리는 더러는 반향(反響)이 약하거나 없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존재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문자가 발명된 이래 동서고금의 선학(先學)들은 그들의 경험과 연구 성과를 글로나 책으로 남겼다. 그 가운데는 세상의 원리를 밝혀낸 과학서적도 있고, 인생의 깊이를 관조한 문학작품도 있고, 또 시대정신을 깨우친 명문(名文)도 있다. 그러나 그런 대작(大作)만이 글이 아니요, 책이 아니다. 마치 성벽을 쌓을 때 큰 돌, 작은 돌이 골고루 필요하듯이 더러는 작지만 강해서 소중하고, 더러는 소소해서 감동을 더하게 하는 것도 있다.

서양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참회록>이 있다면 한국엔 일제하 군수를 지낸 고 이항녕 박사의 참회문 ‘나를 손가락질 해다오’가 있고,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로 끝맺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이 있다면 일제하 의열단(義烈團)의 독립운동 이념과 방략을 천명한 단재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도 있다. 그리고 피히테의 ‘독일국민에게 고함’이 있다면 그보다는 소소하다 할지 모르겠지만 일본의 대표적 지성인 다치바나 다카시 교수의 ‘스무 살 젊은이에게 고함’이라는 글도 있다. 내가 고종석의 절필 선언을 보고 깊은 절망감을 느낀 건 그의 글 다음 대목 때문이다.

“분단체제 극복을 위해 그리도 많은 글을 쓴 백낙청이 통일부 중하급 관료나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소속 국회의원의 보좌관만큼이라도 대한민국의 통일정책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미심쩍었다. 글은, 예외적 경우가 있긴 하겠으나, 세상을 바꾸는 데 무력해 보였다. 달포 전쯤, 술자리에서 친구 차병직이 자조적으로 “책은 안철수 같은 사람이나 쓰는 거야! 우린 아니지!”라고 말했을 때, 나는 진지하게 절필을 생각했다.”

그가 ‘친구’ 차병직 변호사를 만나서 무슨 말 끝에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 모르지만 ‘책은 안철수 같은 사람이나 쓰는 거야!’라고 한 대목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참고로 그는 ‘절필 선언’ 당일 저녁 자신의 트위터에 ‘안철수 지지’ 글을 올렸다) 안철수가 그간 여러 권의 책을 쓰긴 했지만 그를 저술가로 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래서 안철수가 책으로 세상을 바꿨다는 얘기는 더더욱 들어본 적 없다. 그런 안철수에게 ‘문사(文士) 고종석’이 기가 죽어서(?), 아니면 세상이 원망스러워 절필을 결심했다는 건 의아스럽기조차 하다.

백낙청 선생을 통일부 중하급 관리나 외통위 국회의원 보좌관과 대비시킨 대목도 그답지 않다. 견해 차이를 전제한다고 쳐도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통일부 주·사무관급 실무자가 특정정책을 기안하거나 또 정책의 방향을 잡는다고는 해서 그것이 그 개인만의 결정은 아닐뿐더러 외통위 소속 국회의원의 한 보좌관이 자신이 모시는 의원을 통해 어떤 정책에 입김을 불어넣었다고 해서 그게 그냥 나온 것은 아닐 것이다. 백 선생 같은 분이 쓴 글이나 책에서 비롯한 것도 있을 수 있고, 또 백 선생은 그들의 ‘스승’이기도 한 것이다.

문사 중에 더러 절필을 선언했던 사람들이 있다. 리영희 선생은 뇌졸중 후유증으로 말년에 ‘손떨림’이 심해 타계하기 몇 년 전에 절필을 선언하고는 이후 공식적인 글쓰기는 중단했다. 반면 몇몇 문인 중에는 절필을 선언했다가 다시 글쓰기를 시작한 사람들도 있다. 그들에게 절필은 하나의 휴식 차원이었던 모양이다. 고난의 역사 속에서 지식인의 절필은 종종 저항의 상징으로 비쳐지기도 했다. 곡필(曲筆) 대신 차라리 붓을 꺾고야 말겠다는 눈물겨운 투쟁. 그러나 지금 이 시대를 꼭 그리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고종석의 절필은 아쉬움을 넘어 호사스럽기조차 하다. 지금은 붓칼을 갈아 ‘글’로써라도 싸워야할 때이기 때문이다.

 

글: 정운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