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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만 보는 바보---이덕무와 그의 벗들 이야기

리첫 2013. 1. 16. 13:15

이야기 시작

1792년 12월 20일

 

얼마나 잤을까?

 

얼굴을 간질이는 따스한 기운에 눈을 떴다. 다섯 살배기 손자 녀석이 들어와 재롱을 피우나 했더니, 반가운 겨울 햇살이었다. 모처럼 보는 햇살이어서 그런지 창호지 바른 문을 건너 왔건만, 환하고 따스하기가 바깥보다 조금도 덜하지 않은 듯하다. 이리저일 방바닥을 명랑하게 굴러다니는 햇살을 보니 내 마음도 덩달아 밝아진다.

 

벽에 기대어 앉아 나도 모르게 깜박 잠이 든 모양이다. 늘 잠이 부족해 그런지 한동안 꿈을 꾸지 않았는데, 요즘 들어 부쩍 자주 꾼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십여 년의 세월을 훌쩍 건너 백탑 아래 옛 동네를 자주 찾아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더불어 지내던 벗들과 예전처럼 자주 어울리곤 한다.

 

설핏 잠든 꿈속에서도 벗들을 만났던가, 꿈에 나눈 웃음은 아직 입꼬리에 남아 있건만 정작 그 내용은 아스라하기만 하다. 손바닥으로 얼굴 한번 쓸어내리고 저만치 물러나 있는 책상을 가까이 끌어당겼다. 손길이 머물렀던 곳 그대로 책이 펼쳐져 있다. 겨울 햇살이 내 눈길을 따라 책장 위로 닁큼 올라앉는다.

 

벗들과 내가 규장각의 검서관으로 대궐에 들어간 지도 어느덧 십삼 년이 지나고 또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삼십 대에 대궐에 들어가 어느새 사십 대를 훌쩍 보내고 쉰을 넘어선 지도 오래이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기만 한 하루하루는 길었으나,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 보니 한편으로는 순식간에 뭉텅이째 흘러간 것처럼 아쉽기만 하다.

 

세월이 흘러 나의 기력은 쇠하였지만,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일은 여전하였다. 늘 그랬지만, 이달 들어 하루도 제대로 쉬지를 못했다. 섣달이라 종묘(역대 임금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는 왕실의 사당)에 드리는 제사 준비에 바빴고, 주상 전하께서 몸소 젊은 문신들에게 하시는 강의를 준비하고 시험 계획을 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젠 나도 늙었는가. 예전엔 몇 날 밤을 세워도 끄떡없었건만, 요즘은 힘에 부치는 듯하다.

 

이달에도 스무 날이 다 되어가는 어제 오후에야 겨우 며칠 말미를 얻어집에 올 수 있었다. 아버님께 퇴궐 인사를 드리고서는 바로 나의 작은 서재로 향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건만 등촉이 방을 화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 보였다. 책 속에 묻혀 사느라 늘 침침한 내 눈을 염려하는 아들의 마음이 먼저 다녀간 것이리라.

 

종묘 부근의 이 집으로 옮겨 온 지는 십 년이 되어 가지만, ‘청장서옥’이라 불리던 옛집 서재 이름은 그대로이다. 백탑 아래 동네에 살 때, 초라한 나의 집을 안쓰럽게 여긴 벗들이 저마다 가진 책을 팔아 지어 준 공부방이다. 아마 방금 전 꿈속에서도 그곳에서 벗들과 어울렸을 것이다.

 

이 방의 문고리를 잡을 때마다 나는 늘 가슴이 두근거린다. 방에 들어서는 순간 등을 보이며 가지런히 꽂혀 있는 책들이 모두 한꺼번에 나를 향해 눈길을 돌리는 것만 같다. 눈과 눈이 마주치는, 책속에 담긴 누군가의 마음과 내 마음이 마주치는 설렘.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