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된 책들에 스며 있는 은은한 묵향은 내 마음을 편안하게 어루만져 주고, 보풀이 인 낡은 책장들은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아니, 스스로 나에게 다가오기도 한다. 울적한 내 마음을 옛사람들의 노래로 위로해 주기도 하고, 낯선 섬나라의 파도 소리로 마음을 들뜨게 하기도 한다. 내 손이 그 책들을 뽑아 드는 것이 아니라, 방문을 여는 순간 내 얼굴빛과 표정으로 마음을 미루어 짐작한 책들이 스스로 몸을 움직여 다가오는 것만 같다. 하지만 대궐에 들어간 뒤로는 이 방에서 책과 만나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 늘 아쉽기만 하다.
대궐에서도 나는 언제나 책에 파묻혀 지낸다. 그러나 책에서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고, 자료를 모아 책으로 만들어 내는 ‘검서’는 몹시 신경이 쓰이는 일이다. 책이 들려주는 목소리에 편안하게 젖어있기보다는, 점점 가물가물해지는 눈을 크게 뜨고 한 글자라도 틀릴세라 꼼꼼히 들여다보아야만 하는 일이다. 그러고 보면 대궐에서 나는 책의 안과 밖을 지키기만 했을 뿐, 책과 마주앉아 스스럼없이 이야기하지는 못한 것 같다.
게다가 서자(본부인이 아닌 딴 여자에게서 태어난 아들)의 신분으로, 꿈도 꿀 수 없는 벼슬길에 오르게 된 나나 벗들로서는 몸가짐이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대궐에 들어가려 관복을 갈아입을 때마다 감격스럽기는 했으나, 허리에 매는 묵직한 띠가 가슴 아래를 무겁게 누르기도 했다.
대궐에서 나라 안팎의 희귀한 책들을 대할 때면 반가운 여전하였다. 그러나 어렵게 빌린 책을 놓고 한 글자라도 빠질세라, 희미한 등불 아래 꼼꼼하게 옮겨 적던 지난날이 그리울 때도 있다. 그 시절에는 종이가 귀해서, 나는 늘 글씨를 깨알같이 쓰곤 했다. 벗들이 ‘파리머리 문자(승두문자)’라 놀리는 나의 글씨는 그때부터 비롯된 것이다.
겨울 햇살은 어느새 책상 위에서 내려와 방바닥을 굴러다닌다. 입춘도 가까워 오고 설도 가까워 오니, 겨울 햇살이 아니라 이젠 봄 햇살이라 해야 할까.
이렇게 햇살에 편안히 몸과 마음을 내맡기고 있는 것이 얼마 만인가. 책을 읽을 때도, 날이 추울 때도, 먼 곳에 계신 아버님이 그리울 때도, 온전히 햇살만을 의지하며 보낸 날들이 있었다. 그날처럼 햇살은, 하얗게 서리가 내린 내 머리를, 주름진 내 얼굴을, 붓대를 하도 쥐어 굳은살이 박인 손가락을 차례로 쓰다듬어 주었다.
오랜만에 잿빛 구름을 걷어 버리고 나와서인지, 햇살의 움직임이 한결 가볍다. 책장의 보풀도 따라 일어나 햇살이 공중에서 지나가는 길을 보여 주며 함께 동동거린다. 햇살이 내어 주는 그 길을 따라, 나도 옛 기억 속으로 천천히 미끄러져 들어가 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