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를 이불 삼고 <논어>를 병풍 삼아
책과 가까이 지내다 보면, 온기가 없는 무생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체를 대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다. 오래전부터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눈길을 느끈다든가, 제 몸을 벌떡 일으켜서 어려움에 처한 나를 돕고 싶어 하는 마음이 전해져 온다. 그럴 때면 책은 따스한 피가 흐르는, 살아 있는 벗이 된다.
유달리 추운 어느 해 겨울이었다. 습기가 밖으로 배어 나온 벽엔 얼음이 얼었고, 그 얼음벽은 그대로 거울이 되었다. 사방이 거울로 둘러싸여 있는 듯한 방에서, 눈만 퀭한 초라한 내 모습을 보노라면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방바닥은 울퉁불퉁 고르지 못해 물이 담긴 그릇을 놓기라도 하면 엎질러지기 일쑤였다. 엎어진 물은 이내 그 자리에서 얼어 방바닥도 미끄러운 거울이 되었다.
밤이 되면 방 안의 벌레들조차 추위를 피해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왔다. 입김은 공중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곧장 성에가 되어 이불에 맺혔다. 얼어서 빳빳해진 이불깃에서는 부러질 듯 와삭와삭하는 소리가 났다. 그나마 얇은 종잇장 같은 이불조차도 넉넉하지 않아, 긴긴 겨울밤을 홑이불 한 장으로 추위와 싸우며 보내야 했다. 덜덜 떨리는 아래턱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차가운 이불 아래에서 시를 몇 편이나 외우고 또 외웠는지 모른다.
그러나 도저히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다시 일어나 앉았다. 그때였다. 윗목에서 기척이 나는 듯했다. 차곡차곡 쌓아 둔 <한서:漢書 > 한 질이 할 말이 있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책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퍼뜩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책을 펼쳐 이불 위에 죽 늘어놓았다. 그러고는 늘어놓은 책들이 흐트러질세라, 조심스럽게 몸을 이불 속에 뉘었다.
두둑한 책의 무게가 얇은 홑이불을 눌러 체온이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 주었다. 따스했다. 두툼하게 솜을 넣은 비단 이불이 부럽지 않았다. 낡고 해져 초라한 나의 이불은 이제, 중국의 역사로 무늬를 넣은 멋진 이불이 된 셈이다. 이불깃은 더 이상 와삭거리지 않고, 간혹 위로 들린 깃마저 책들이 꼭꼭 여며 주었다. 그 손길이 무척 따스하고 편안해, 그날 밤 나는 모처럼 깊이 잠을 잘 수 있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갈라진 벽의 틈새로 사납고 매서운 바람이 불어 들어와, 방 안의 등불이 몹시 흔들렸다. 바람 앞의 등불이라더니, 꺼질 듯 꺼질 듯하는 다급한 몸부림이 몹시 위태로웠다. 마구 흔들리는 불빛 아래에서 책을 계속 읽을 수가 없었다. 안타까이 등불을 바라보며 무슨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방금 읽고 바닥에 내려놓은 <논어:論語>가 눈에 들어왔다. 마치 이런 말을 건네며 제 몸을 일으켜 내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내 몸으로 바람을 막아 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