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국내외 영어학습자들
동양인명록(가나다순)
간다노부(神田乃武:1857-1923):윤치호의 영어선생. 미야오카의 소개로 약 2주일 동안 교과서 없이 구두로 영어를 배우다가 임오군란 때문에 중지되었다. 간다는 화란(네덜란드)어 학자였던 간다고오헤이(神田孝平)의 양자로서 1871년 도미하여 앰허스트(Amherst) 대학을 마치고 1879년 귀국한 뒤 동경제국대학과 동경고등상업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는데 1898년에는 남작이 되고 중의원 의원이 되었다. 그는 체임벌린의 의 제자로서 한성일어학교에 고빙된 오카쿠라(1868-1936)처럼 예스퍼슨(Jesperson) 교수법 원리의 영향을 받은 영학자로서 그가 지은 "킹스 크라운 리더스<The King's Crown Readers>"(1926) 등은 조선총독부의 검인정 교과서로 채택되었다. 간다는 자기보다 1년 늦게 일곱 살의 소녀로 도미 유학하여 1900년에 쓰다영학숙(津田英學塾)을 세운 쓰다우메코(津田梅子:1864-1929)에게 청혼하였으나 독신주의자라 거절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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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향란(姜香蘭): 1922년에는 한남 권번(券番)의 강향란이 중국인 이발사의 도움으로 머리를 깍고 남자 옷을 입은 뒤 배화여학교에 입학하여 영어를 비롯한 신학문을 배웠는데 훗날에는 서대문안의 어떤 강습소에 다니다가 상해와 동경을 유람하고 돌아온 다음 1925년에는 어엿한 신문기자 생활을 하였다. 일본의 현기(현기)도 선비 손님들이 영어로만 수작을 하는지라 홧김에 머리도구를 팔아서 영어를 배웠다고 하니 사정은 비슷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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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철(高永喆): “조선책략”에는 조선 학생들을 북경의 경사동문관(京師同文館)에 보내 서양말을 배워오게 하라는 권고안도 함께 포함되어 있었으나 실상은 오로지 무기제조 기술만을 배우도록 보냈던 것이었다. 그러나 유학생들은 모두 영어를 배울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영어만을 전습한 유학생도 있게 되었다.
당시 오중상(吳仲翔) 관찰이 관할하던 수사학당(水師學堂)은 1880년 이홍장(李鴻章)의 주청에 의하여 복건성(福建省)에 세워진 것이어서 자연히 복건성 태생의 사람들이 많았다. 학과는 항해과와 기관과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입학 연령은 13세에서 20세까지로 총명하고 기력이 있는 사람 중에서 경서(經書) 두서너 권을 읽은 적이 있는 자를 선발하였고 오전에는 영어와 영문, 오후에는 한문을 가르쳤으며 산수도 아울러 가르쳤다. 나아가서 2-3학년은 천문학, 4학년은 기하, 역학, 미적분, 측량, 화학 등을 배우고 5학년에는 외국인 연습선 교원을 따라서 선박, 돛대 다루기 등을 배웠다. 5년의 기한이 찬 뒤에는 영어시험 등을 치룬 다음, 외항 연습선을 타고 바람과 파도를 견디어 내기, 해상 행군, 포진법 등을 익힌 뒤에 능력에 따라서 우수한 자는 유럽에 보내어 더욱 정진케 하여 크게 기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조선 유학생들이 이 수사학당에 입학하여 어학을 배우겠다는 바람에 김윤식은 오(吳) 관찰과 협의한 끝에 1881년 12월 10일 오후 2시 학도 7명을 거느리고 수사국(水師局)을 방문하였다. 복건성 태생으로서 중서학당 출신인 영어교사 허조기(許兆基)와 조렴정(曺廉正)이 조선 학도들을 차례로 불러 들여서 시험을 치렀다. 맨 먼저 조한근(趙漢根)이 불려 들어갔는데, 허 선생이 먼저 발음하는 대로 따라서 발음하게 되면 발음의 맑고 흐림을 분간하고, “좌전(左傳)”을 내주어 한문을 읽혀 본 다음 논문을 지을 수 있는가를 물어서 합당하면 뽑고 그렇지 못하면 퇴짜를 놨다. 시험 결과 조한근(趙漢根), 고영철(高永喆), 김광련(金光鍊), 이희민(李熙民), 등이 합격되어 그 달 17일 7시부터 입학이 되고 나머지 3명의 학생들은 다른 학당이나 공창(工廠)으로 보내졌다.
그런데 이들 유학생 중에서 조한근은 이듬해 2월 1일에 글을 쓰고 외우는 재간이 부족하다는 것을 진정한 뒤 자퇴하면서 전기창으로 옮겼으며 그곳에서 그의 총명한 적성을 나타냈다. 또한 김광련과 이희민도 2월 11일 이전에 자퇴하면서 김광련은 동모창(銅冒廠)으로 옮기고 이희민은 입이 둔하다면서 화학창(化學廠)으로 옮기었다.
그러나 고영철만은 끝까지 남아서 한문이나 양창대(洋艙隊) 공부는 하지를 않고 오로지 영어-영문만을 배웠으며 학당 안에서 매우 재간이 있다는 평판을 듣게 되었다. 그가 수사학당에서 영어를 배운 기간은 1881년 12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의 8개월에 불과하였고, 학습열에 비해서 그 성과는 만족스럽지를 못하였다. 그는 귀국한 뒤 1883년 8월3일 서울재동에 세워진 동문학교의 주사(主事)에 임명되었으며, 민영익(閔泳翊)을 대표로 하는 대미 보빙사절단으로 선발되어 도미했다. 그러나 영어 통역을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외국인 통역관과 비서가 따로 초빙되었다.
어학이란 짧은 시일 안에 완성할 수가 없는 것이고 10년 동안 영어를 배워도 영어 편지 한 장을 쓰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지만, 청국인들은 외국어 학습의 최저 소요 기간을 5년으로 잡고 있었는데 조선 유학생의 유학 기간이 2년에 불과하였으니 계획 자체부터 차질이 있었던 것이다.
고영철은 그 뒤 지방관도 지낸 바 있는데 그의 셋째 아들인 고희동(高羲東)도 어학에 뜻을 품고 1889년에 관립한성법어학교에 들어가서 1903년까지 마르텔(Emile Martel)로부터 프랑스 말을 배우고, 1904년부터 궁내부 주사로 봉직하였다. 그러나 제2차 한일협약이 체결된 후 비통한 울분을 그림과 술로나 풀어 보리라는 생각에서 그림 공부로 전향하여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 귀국한 뒤에는 중앙고보의 미술 교사 등을 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보빙사절의 국제통역
1883년 5월 19일 조-미 조약의 비준서가 서울에서 교한되자, 통리아문 협판 민영익(1860-1914)을 전권대신으로 하는 대미 보빙사 일행 9명이 6월 17일 모노카시(Mocacy)호 편으로 제물포를 더난 뒤, 도쿄에서 외국인 2명을 초빙하여 8월18일 상선 아라빅(Arabic)호 편으로 요코하마를 떠나서 9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일행 중 조선인으로서 영어를 조금이라도 알던 사람은 고영철뿐이었고, 당소의(唐紹儀) 등과 함께 건너와서 인천세무사의 방판으로 있던 청국인 오예당(吳禮堂)이 영어와 스페인어를 잘하여 청국어 통여관이 고영철과 오예당을 할용하는 3각 통역망도 구성될 수 있었으나 오예당은 통역관으로 초빙된 것이 아니어서 모든 의사소통은 민영익의 말을 유길준(兪吉濬)이 일본말로 일본인 미야오카(宮岡)에게 전하면 영어로 로웰에게 옮기는 4각 통역망으로 언어장벽을 해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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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동(高羲東): 고영철의 셋째 아들
권중휘(權重輝): 동경제대에서 영문학 전공
김광순(金光淳): 일선화영신자전<日鮮華英新字典:신구서림/1917>을 이온(李瑥)과 함께 지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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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金奎植):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부주석을 역임했던 김규식은 언더우드 학당을 마치고 서재필이 경영하는 “독립신문”에 잠시 근무하다가 서재필의 권유로 미국 유학길에 올라 로어노크 대학에서 수학했다. 귀국 후 언더우드의 비서로 있으면서 YMCA 학생부 간사 및 교사, 경신학교 교사 및 교감, 배재전문 영어강사, 연희전문 강사를 지내다가 1913년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저서: 실용영어<Practical English:1945>, 영시-양자유경<楊子幽景, The Lure of the Yangtze:1945>
김규식의 영시--양자유경: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킨 일본의 항복 직후에 쓰여진 “양자유경”은 상해에서 남경, 한구, 중경까지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그 주위의 경관과 그 주변의 역사를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시켜 읊은 것으로, ‘In Memoriam Victoriae전승을 기념하여’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개화기에 영어를 배운 한 선인이 영어를 어느 정도 어떻게 구사했는지를 살펴보는데도 참고가 되겠기에 “양자유경”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Apology란 이름이 붙은 저자의 서문의 앞부분에서,
The author claims no great intimacy with the Muse, and this is not intended to be even a rash attempt at any kind of poetical flourish. At best it is only a feeble effort to express in some articulate form the many musings the writer has often had in his several trip up and down the vast, deep, meaningful, even-luring, mighty Yangtze.
In conformity with its great length, what a long and crowded history of its land and people it carries in its ceaselessly flowing bosom!(해설: 저자는 시의 여신과 친밀한 교감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분수 넘게 화려한 시적 문채를 구사하려는 의도는 당초부터 없었음을 밝혀둔다. 기껏 한 것이, 광막하고 깊디 깊으며 의미장중하여 언제나 사람의 영혼을 끌어당기는 거대한 양자강을 몇 차례 오르내리면서, 그 때마다 음절형식으로 표현하고자 한 어설픈 작품에 불과하다.
웅장한 양자강의 길이를 따라 닮았고, 끊임없는 그 흐름의 품속에서 자란 이 땅의 사람들의 역사는 얼마나 장구한가, 얼마나 다사다난한 것인가!)
(2) 제1장 “The Entry to Shanghai 상해로 들어가는 강어귀”의 첫 부분.
Heave, Ho! Heave, Ho! Pull me the mainsail up,
Add a Flying jib to foremost there.
Wind is fav'ring us; we've got the cup!
Deck 'The lady of the Sea' with care,
Schooner proud is she, as we of her,
Having won a race six thousand miles.
Traversed she the ocean, nor did err
Through typhoons and South Pacific isles.
Now we've reached the last lap of the race:
When anon we dock her at Shanghai,
Wat applauding throng she'll have to face!
"That's a record!" shouts each passer-by.
Heave, Ho! Heave, Ho! Just look. here we are
At the mouth of mighty Yangtze come
어여차, 어여차! 돛을 올려라!
펄럭이는 삼각돛도 앞 돛대에 올려라!
바람은 우리편, 우승컵은 우리 차지
‘바다의 귀부인’을 곱게 단장하라.
워낙 훌륭한 이 범선은 우리의 자랑
6천 마일 경주에서 선두를 지켜왔다.
태풍을 헤치고 무사히 남태평양 섬들을 지나,
이제 우리는 마지막 물길 앞에 이르렀거니
곧 상해에 정박하면
군중은 우리 ‘바다의 귀부인’에게 얼마나 열렬한 환호를
보낼 것이랴.
길손들은 외치리라 “대단한 기록이다!”
어여차, 어여차!
보라 우리는 지금
광대한 양자강 어귀에 와 있다.(자료 출처: 우사연구회에서 2000년에 발행한 “양자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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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金大建)--어학의 천재: 서울에서는 유진길(劉進吉)로부터 중국어를 배우고 마카오의 포르투갈 신학교(The Portuguese Seminary)에서는 1837년 6월 6일부터 5년 동안 레그레조아(P. Legregois), 리브와(P. Libois), 매스트르(P. Maistre) 등의 신부 밑에서 라틴어, 프랑스어, 영어 등을 비롯한 신학 공부를 하고 최초의 신부가 된 김대건(1821-1846)은 자타가 인정하던 어학의 천재로서 6개 국어를 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그가 상해에서 모교의 은사인 리브와 신부에게 보냈던 1845년 7월 23일자 서한에는 그가 영어를 해득했음을 입증하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이 때, 청국 관리들은 제가 영국인하고 얘기하는 것을 보고, ‘저 사람이 조선 사람인데 어떻게 해서 영국인 친구가 있고 영국 말을 알아듣는가?’ 하면서 대단히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또한 그는 1846년 5월 12일 등산 첨사에게 체포된 뒤 영어로 된 지구전도를 번역, 채색하여 임금에게 바치기도 하였다.
한편, 영국 장교 파버(Pover)는, “영국 장교들은 이 청년이 지식도 넓고 좋은 교육도 받았고 함께 지내기에 재미있는 사람임을 잘 알고 있다. 그는 학식도 많고 상식도 많으며 6개 국어를 할 줄 안다”고 말하였다. 천재는 요절한다지만 26세의 젊은 나이로 순교하지만 않았다면, 김대건 신부는 63세가 되었을 해에 체결된 한미수호조약 때 활약할 수 있었을 아까운 인물이었다. 그 당시 헌종(憲宗)의 김대건 사형 결정 이유가 그가 국법을 어기고 서양을 다녀왔다는 하찮은 내용이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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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성(金東成):
김동성의 최신선영사전
“무선생속수영어독학(無先生速修英語獨學)의 저자기이도 한 천리구(千里駒) 김동성은 1928년 12월 28일 “최신선영사전(最新鮮英辭典:The New Korean English Dictionary"를 펴냈다. 이것은 한국인이 저술한 한영사전의 효시로써 한글학자 권덕규(權悳奎)가 교열한 것인데 10년이 걸려서 완성된 것이었다.
하지(Hodge)가 한국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만들었던 사전들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사전에는 용례가 없었으나 이 사전에는 품사명과 용례가 곁들여져 있어 활용도를 높여주고 있는데, 게일의 “한영대자전”과 비교하여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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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선영사전(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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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대자전(19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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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즁지병(花中之餠) Nau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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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tures of bread useless for foo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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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자: A wise man
예: 지자천려필유일실(智者千慮必有一失: Even a wise man will sometimes make mistakes. |
Even a wise man is not at all infallible. |
당시는 조선총독부에서 출판물의 원고를 사저 검열할 때인데도 일제가 알았더라면 큰일 날 뻔했던 민족적인 표현이 산견된다.
수록된 속담 중에서 “천상천하유아독존”을 일본의 사전과 비교하여 보면 그 특색이 돋보인다.
김동성 “선영사전”: Throughout Heaven and earth I alone am holy.
사이토(齋藤秀三郞) “화영(和英)대사전: I am the center of the universe.
이노우에(井上十吉) “화영대사전”: In Heaven and in earth I only am to be revered.
사전의 뒷부분에는 “필기 및 인쇄용 부호”와 “조선신문지법”의 대역문이 있고, 서울의 낮 12시를 기준한 세계 대도시의 시차표 그림이 있다. 1945년 11월에 국제통신사의 주간이었던 저자는 23,000단어가 수록된 구판을 “최신 한영사전”으로 제목을 바꾸어 발행하였다.
일제하의 도미 유학생들이 영화(英和) 사전을 쓰던 고충을 상도할 때, 영어가 전래된 지 반세기만에 한영사전이라도 나온 것은 참으로 대견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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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기(金善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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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金玉均)
개화사상의 구심적인 인물이요 갑신정변의 주역인 김옥균은 개화의 상징적인 존재로서, 윤치호(尹致昊) 청년에게 영어공부를 권하는 한편, 자신도 몸소 영어공부에 앞장을 섰던 영학의 선각자이기도 하였다.
1883년 일본 동경에 체류 중이던 김옥균은 그 해 1월 7일에 동경대학의 박언학(博言學) 교수로 있던 체임벌린(Basil Hall Chamberlain: 1850-1935)의 집으로 찾아가서 알파벳을 처음으로 배웠는데, 체임벌린 교수는 공교롭게도 배즐 홀(Basil Hall) 함장의 맏따님이 윌리엄 체임벌린(William Charles Chamberlain)에게 출가하여 낳은 홀 함장의 외손자였다. 체임벌린 교수는 일본에 관한 많은 연구서를 남겼는데, 특히 주한 영국 총영사로 있던 애스톤(W.G. Aston: 1841-1911) 및 주일 영국 공사관에 근무하면서 일본어와 한국서지 연구에도 조예가 깊었던 새토우(Sir Ernest Satow: 1843-1929)와 함께 지어낸 "한국 지명 및 고유명사 편람: A Manual od Korean Geographical and Other Proper Names"은 게일 (J.S. Gale) 박사가1897년 요코하마에서 출판한 "한영자전(韓英字典): A Korean English Dictionary"에도 인용된 바 있다.
조선정부의 초청을 받고 육영공원(育英公院)의 교사로 초빙되어 오는 뉴욕 유니언 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 출신의 헐버트(Homer Bezaleel Hullbert: 1863-1949), 벙커(Dalzell Adelbert Bunker: 1853-1932), 길모어(George William Gilmore: 1858-1933)가 1886년 7월 4일 제물포 항구에 도착하였을 때는 김옥균이 마중나가서 제물포 시내를 가리키면서 일본에서 배운 영어로 “My country. I very glad."라는 말을 했다. 그는 지금의 외무부격인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내당청(內堂廳)에 영어 통역관의 속성 양성을 위하여 1883년 8월 3일에 동문학(同文學)을 설립한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öllendorff)가 살던 박동 저택에 마련된 정구장에서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테니스를 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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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金允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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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정(金潤晶)--가족 전체가 미국 유학
마지막 주미공사였던 김윤정(1869-1949)은 당시 보기 드문 가족 전원의 도미 유학을 단행한 선각자였는데, 무관으로서 갑신정변에 가담했다던 그는 한때 러시아에도 가보았으나 사람 살 곳이 못 된다면서 1897년 장남 용주(用柱:1890-1940)와 함께 미국에 건너가서 고학으로 마운트 허몬 스쿨(Mount Hermon School)과 워싱턴의 갈로데 대학(Gallaudet College)을 졸업(1903. 6.30)하였다. 1904년 4월 30일 주미공사관의 서기관으로 현지 채용되었다가 이듬해 6월 23일에는 3등 참사관으로 승진하여 신태무의 후임으로 대리공사가 되어 생활이 안정되자 해외 생활에 익숙하려고 일본 센다이의 서양 선교사 집에 가있던 부인 고순영(高純迎:1869-1952)과 장녀 고려(1890.2.27생)를 1906년 공관에 불러다가 오랜만에 온 식구가 재회하여 단란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김윤정 부자(父子)가 학생이었던 1901년에는 관비 유학생인 이강(李剛)을 제외하고는, 브라운 대학(Brown College)의 김규식(金奎植), 백상규(白象奎), 오하이오 웨슬레이안 대학(Ohio Wesleyan College)의 하란사(河蘭史) 등 모두 17명의 사비 유학생이 있었는데 고순영 모녀도 워싱턴에서 공부하였으니 조지워싱턴(George Washington University) 대학에 다녔던 이강과 이승만 등도 고 여사의 정성어린 요리 대접을 받기도 했다. 김용주(金用柱)는 한성외국어학교 영어부 출신으로 마운트 허몬 스쿨(Mount Hermon School)에 유학한 임병직(林炳稷)의 2년 선배였다. 당시의 마운트 허몬 스쿨의 유학생으로는 추수감사절에 파트너가 된 매리(Mary Surh)양 과 1897년부터 도미 유학하여 1902년 10월에 입학했고 훗날 내각 서기랑(書記郞)을 지낸 김상언(金相彦)도 있었다. 김용주는 그 뒤 펜실배니아, 스탠포드, 콜로라도 대학의 영문과를 졸업하고 1925년부터 “서울 프레스(The Seoul Press)”의 편집인 겸 주필과 AP통신 특파원으로 있으면서 로터리 클럽(The Rotary Club)의 창립에도 참여하였는데 영어가 유창하여 “Chatter-box”라 애칭되던 백상규와 YMCA 식당에서 담화할 때면 서양인으로 착각될 정도였다. 그는 축농증 수술의 후유증으로 대학병원에서 50세에 별세하였다.
1906년 주미공사관을 철수한 김윤정은 귀국하여 인천감리로서 인천일어학교장을 겸직하였을 때 김구(金九)의 망명을 도왔다고 한다. 또한, 그가 졸업했던 갈로데(Gallaudet) 대학 설립 취지인 농아교육사업을 다라, 귀구해서도 농아교육으로 수화(手話)를 하였다고 하니 맹아에게 영어를 가르친 로크웰(Rockwell) 및 홀(Hall)부인과 함께 기억되어야 하리라. 김윤정은 전주 참의와 왜정 때는 충북 지사 및 중추원 참의를 지냈으며 해방후 러취 군정장관 부인은 그의 인품에 탄복되어 지도급 인물이라는 것을 미국 대통령에게 아뢰겠다고 하면서 손수 초상화까지 그렸다고 한다. 워싱턴 여학교와 도쿄여자학원 출신의 고려(高麗)는 학무국장 윤치오(尹致晤)의 재취부인으로 출가하여 1908년에 양심여학교(養心女學校)를 설립 경영하면서 인천일어학교 졸업식에는 동부인 참석하여 아버님을 뵈었다. 김윤정은 슬하에 13남매를 두었으나 차남 인주(仁柱:1909-1979)도 별세하고 출가한 따님들인 미자(美子)와 숙자(淑子)씨가 생존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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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무라마사오(中村正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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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하마만지로(中濱萬次郞)
나카하마 만지로--일본의 영학(英學)동정
쇄국시대라 할지라도 조선 정부는 해외 정세에 아주 어두웠던 것만은 아니었다. 일본의 에도바쿠후(江戶幕府)가 런던에 몇 명의 유학생을 파견하였는데 모두가 영어에 능통하다는 것과 독리선무장군(督理船務將軍) 나카하마(中濱萬次郞)가 달포 전에 청국의 상해(上海)에 화륜선을 건조하러 갔었는데 그의 지혜가 영민하다는 것까지도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1863년 조오슈우번(長州藩)에서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 이노우에가오루(井上馨) 등을 영국에 유학시킨 것을 비롯하여, 1865년에는 가고시마번에서 모리유레이(森有禮) 등을 영국에 유학시켰으며 1866년에는 정부 차원에서 나카무라(中村正直) 등 14명을 영국에 유학시킨 일이 있다. 그 중에서 나카무라는 ‘서양은 단순한 물질문명의 나라가 아니라 그들의 부강은 백성들의 자조정신에서 비롯된다’ 는 것을 깊이 개달았다. 그는 귀국할 때 영국인 친구로부터 선물받은 스마일스(Samuel Smiles)의 저서 “자조론(Self-Help)”(1859)이야말로 나라를 부강케 하는 자조정신이 담긴 명저라는 생각에서 1871년에 “서국입지편(西國立志編)”이라는 이름으로 출판하였다. 그가 1873년에 설립한 도오진샤(同人社)에는 윤치호(尹致昊)가 유학하게 되어 그 감화를 받았으며 최남선(崔南善)도 1918년에 “자조론(自助論)”의 상편을 번역 발행하였다.
한편 나카하마는 15세 때인 1842년 도사(土佐)의 어촌에서 고기잡이에 나갔다가 폭풍을 만나 7일 동안의 표류 끝에 외딴 섬에서 새를 잡아먹으면서 반년이나 연명하다가 1841년 6월 27일 미국인 위트필드(William Whitfield) 선장이 거느리는 고래잡이 배에 구조되어 미국에서 보통교육과 항해술을 배운 뒤 1851년 귀구하였다. 그는 1853년에는 에도 정부에 등용되어 항해, 측량, 조선(造船) 등의 일을 맡아 보았으며 해밀턴 메서드(Hamilton Method)가 엮은 “영미대화첩경”(1859)을 발행하기도 하면서 서양 문명을 일본에 이식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뒤에 살펴보겠거니와 우리나라에서 발행된 영어 자습서도 해밀턴 메서드에 의하여 편집된 것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그러한 경향은 해방 뒤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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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翰西) 남궁억(南宮檍)
동문학교의 1회 졸업생인 남궁억(1863-1939)은 20세에 송달현(宋達顯), 주우남(朱雨南)과 도포에 통영갓 차림으로 배웠는데 길에서 만나는 친구마저 서학(西學)을 하는 ‘천주학쟁이’라 하여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가족조차 절교하였으나 장래를 보고 삯바느질하는 모친 슬하의 냉방에서 밤새도록 단어마다 붉은 점이 찍힌 영어사전이 덜어지다시피 읽었는데 한 단어에 5회 이상 점이 찍히는 경우를 극복하면서 공부한 끝에 우등으로 졸업했으며 그가 방안에서 말할 때면 영국 사람끼리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한서 남궁억이 지은 “조선 니야기”에는 다음과 같은 동문학교의 풍경이 묘사되어 있다.
외아문 구내에 관립영어학교를 세우고 생도를 모집 교수하였으니 이는 조선 신식학교의 효시인데 우스운 일은 소위 생도 중 약간인은 이정승, 김판서의 자질로 등제한 소년이라 매일 아침 등교 때에 도포를 입고 보교(步轎) 위에 담뱃대를 비스듬히 물고 앉았는데 보교군 두 명 외에 구종 한 명이 요강망태와 담배설합을 등에 지고 별배(別陪) 두 명이 ‘에라 물러 섰거라“하는 벽제성으로 큰 길을 건너 문 앞에서 내려 엄연한 태도로 갈지자 걸음을 할 때 두 별배가 두 겨드랑이를 부축하고 천천히 층계를 올라간즉 교사는 영국인이라 우리 습속에 소매(견문이 좁고 사리에 어두움)하여 통역에게 이르기를 생도로 보건대 얼굴이 창백하고 걸음이 느리며 두 사람이 부축하고 걸으니 필시 환자이니 아무리 등교 시간이 지중하더라도 하루 이틀 집에서 치료하여 차도가 있은 뒤에 등교하여도 무방하니 당장 돌아가도록 권고하니 통역이 깔깔 웃으며 그 뜻을 전하자 장내의 생도가 아이구 우섭다고 하더라.
1884년 6월에 졸업한 한서 남궁억은 메릴(Henry F. Merill)이 있던 묵관(墨館)과 뭬렌도르프가 있던 박동관(礡洞館), 인천세무사 등의 번역관으로 월급 20원에 있었으며, 인천 세창양행주인 월터(Carl Walter)를 고종이 불어올 때나 1886년 내부주사로 있을 때는 어전 통역을 하였다.
1887년에는 전권대신 조신희(趙臣熙)를 수행하여 구라파 여러 나라를 돌고 1889년 1월에 귀국한 그는 이번에는 궁내부(宮內部) 별군직(別軍職)으로 4개년 동안을 지냈고, 경상도 칠곡(漆谷)의 부사(府使)를 지낸 다음 다시 내부의 토목국장(1894-1897)을 지냈는데, 내부 토목국장 재직시 밤에는 흥화학교에서 영문법과 동국사를 가르쳤다. 그 후 독립협회의 수석총무와 사법위원으로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의 편집을 보았고 황성신문 사장을 역임했다. 그는 양양군수 재직(1906-1907)시에 세운 현산학교에서 영어와 음악을 가르쳤으며, 배화학당에서 영문법과 대한역사의 교사로 재직(1910-1918)시에는 상동청년학원(남대문의 새로나 백화점 자리에 있었음)의 장을 겸직하였다.
배화학당 재직 시의 한서 남궁억에게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1914년 2월의 어느 토요일 배화학당 고등과 3회생 14명을 위한 영문법 시간에도 한서는 전처럼 조선 역사를 가르쳤는데, 총독부의 세키야(關屋貞三郞) 학무국장 일행이 갑작스럽게 들이닥치자, 망을 보던 학생의 연필 치는 신호로 역사책은 삽시간에 감춰진 듯 하였으나 평소에 덤벙대는 류인희(柳仁姬)가 미처 감추지 못한 채 걸상 밑에 떨어뜨린 것을 발로 집어 올려 치마 속에 감추게 되었고 선생은 의연하게 영문을 칠판에 쓰면서 영어에 재질이 있는 김오재(金悟材) 학생에게 읽혔다. 우여곡절 끝에 고대하던 수업 종료의 종이 울리고 방문객이 사라진 뒤 선생은 울음을 터뜨리는 류 양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모든 것이 어른들의 죄라면서 후원으로 갔다.
한서의 둘째 따님 자경(慈卿:4회)도 배화에서 영문법을 배웠는데 영어는 책도 없었고 아버님이 칠판에 써놓으면 종이나 검은 석판(신문지 1/4크기)에 석필로 써서 배웠으며 아버님은 발음이 명확하다는 평판을 들었다고 한다. 자경 여사는 영어와 한글을 연구하고 조국의 완전한 자주 독립을 추구하는데 뜻을 함께한 부친과 좌옹 윤치호와의 오랜 세교로 정혼된 바에 따라 좌옹의 차남인 윤광선(尹光善)과 결혼하였는데 좌옹은 애국가를 작사하였다고도 하며 한서는 무궁화를 국화로 보급하는데 앞장선 일도 있다.
외아들인 남궁염(南宮炎)은 한성영어학교 제3회 졸업생(1902년 11월-1905년 1월까지였고, 최종 졸업생은 7명)으로, 배재학당을 나온뒤 YMCA창립에 참여하다가 도미하여 1918년 랜돌프-매이컨(Randolph-Macon College) 대학을 나온 뒤 구미위원 부서기, 뉴욕 주재 총영사를 지냈으며 미망인과 3남매를 남겼다. 1918년 강원도 홍천군 모곡리에 낙향한 한서가 세운 보통학교의 3학년에서는 알파벳부터 영문법을 1주당 2시간, 4학년에서는 읽기-영작 등을 1주당 4시간씩 가르쳤는데, 이는 1920년대 동양의 초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친 유일한 학교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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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오준페이(信夫淳平)
노부오준페이(信夫淳平)--일본외교관이 본 개화기 한국의 외국어 교육
1900년 당시 외교관으로 한국에 근무하던 일본인 노부오준페이는 그의 저서 “한반도”(서울대 도서관 소장)에서 다음과 같이 외국어학교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다.
...그간 홀로 비교적 융성혁혁하게 발전한 것은 학교뿐이다. ... 따라서 어학교육의 진보로 말하자면... 경성에 있어서는 일인으로서 불완전하나마 수 개의 외국어를 겸해 자유자재로 말하는 자는 한인 중에 진구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 숙달의 신속한 것과 발음의 현려함은 생각건대 본방인(일본인)이 몇 걸음 양보하지 않을 수 없다. (“한반도” 동경, 1901, 127쪽)
노부오는 이 저서에서 당시의 외국어 교육과 관련하여 다음 과 같이 아주 뼈아픈 논급도 하고 있다.
... 주한영국영사가 재작년 본국 정부에 보고한 한국 재정경황 중 한국의 어학 교육비에 언급하여 ‘한국인은 동양에서 가장 뛰어난 어학자로 외국어 학습에 대한 열성은 그 이상의 여지가 없을 정도여서 서울에 외국인이 들어온 지 14년이 안되건만 영어의 능통함은 40여 년간 외국인을 접한 북경과 비할 바가 아니며 그 뛰어남을 중국인이나 일본인은 감히 다르지를 못하리라’고 보고하고 있는데 이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런데 한국이 왜 이렇게 어학교육에 열심인가 하는 것은 그 설명이 어렵지 않다. 만약 서반아(西班牙), 이태리(伊太利), 토이기(土耳其), 또는 희랍(希臘) 등의 사신관이 한국에 설립된다고 가정해보자. 한국에는 당장 이와 같은 나라의 어학교가 설립될 것이다. 거기에다 이와 같은 각 외국어학교의 생도 증감의 현상도 기묘하기 작이 없다. 예컨대 일본의 세력이 한국의 조정에 미치면 일어학교가 단연코 융성하고 노국(露國)의 세력이 성할 때 노어학교의 생도 수는 또한 갑자기 증가하는 것이어서 한국조정의 각국세력을 비교해 보기 위해서는 행인지 불행인지 외국어학교의 성쇠를 살피는 일이 첩경이다. 더욱 기묘한 것은 이 외국어학교는 수업료를 징수 안할뿐더러 점심 값을 지급하기 때문에 점심 값을 받으러 학교에 가는 자도 있기 때문에 어학능력이 비교적 발달하리라는 것은 마땅한 일로 돌릴 수 있겠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과연 인재가 양성될 것인가? 겨우 양성되는 것은 소통변에 불과할 따름이다.
계속해서 노부오는 당시 일어학교의 교장이었으며 훗날 일본 영어교육에 공헌이 컸던 오카쿠라(岡倉由三郞)의 당시 한국 외국어학교의 현황에 대한 언급을 인용하고 있는데, ‘오카쿠라는 한국학생이 신사적으로 대하기보다는 질정려계(叱正勵戒)함으로써 말을 잘 듣는다는 것, 기복(忌服)에 대한 의례절차가 까다로워 출석이 무상하다는 것, 아직도 우산 쓰는 법을 몰라 우천시에는 결석이 잦고, 경우에 따라서는 한달에 3,4회씩 실시되는 과거 때문에 임시휴업이 잦았다는 것...’등을 지적하고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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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카겐코(田中玄黃): 일본 땅 아이즈(會津)에 고려인삼과 함께 옻나무를 심게 한 다나카겐사이(田中玄宰)의 후손으로서 평양고보(일어학교의 후신)의 교장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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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소의(唐紹儀)
마건상(馬建常)
마건충(馬建忠)
문명진(文明鎭)
미야오카(宮岡恒次郞)
민영익(閔泳翊)
민영환(閔泳煥)
박술음(朴術音)
백홍준(白鴻俊)
변 수(邊 燧)
사이토(齋藤秀三郞)
사이토(齋藤修一郞)
서광범(徐光範)
서재필(徐載弼)
서태후(西太后)
선우일(鮮宇日)
선화(옥전)
신면휴(申冕休)
신흥우(申興雨)
아더(阿土)
양주동(梁柱東)
오예당(吳禮堂)
오중현(吳仲賢)
오카쿠라(岡倉由三郞)
오화섭(吳華燮)
유길준(兪吉濬)
윤치오(尹致旿)
윤치호(尹致昊)
윤태헌(尹泰憲)
이광수(李光洙)
이기룡(李起龍)
이노우에(井上角五郞)
이노우에(正上十吉)
이노우에(正上馨)
이능화(李能和)
이상재(李商在)
이승만(李承萬)
이양하(李敭河)
이 온(李 塭)
이완용(李完用)
이원익(李源益)
이응찬(李應贊)
이인영(李仁榮)
이종극(李鍾極)
이 준(李 儁)
이채연(李采淵)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
이희승(李熙昇)
임병직(林炳稷)
임 운(任 運)
장두철(張斗徹)
장봉환(張鳳煥)
정경원(鄭敬源)
정 교(鄭 喬)
정구영(鄭求瑛)
정약용(丁若鏞)
정운복(鄭雲復)
정인섭(鄭寅燮)
조용만(趙容萬)
주시경(周時經)
지석영(池錫永)
최남선(崔南善)
최명호
현공렴(玄公廉)
현 채(玄 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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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명록
게일(James Scarth Gale)
기포드(Daniel Lyman Gifford)
길모어(George William Gilmore)
노블(W. A. Noble)
닌스테드(F. J. H. Neinstead)
다이(William McEntre Dye)
로스(John Ross)
로웰(Percival Lowell)
마르텔(Emile Martel)
매킨타이어(John McIntyre)
메드허스트(Walter Henry Medhurst)
메서드(Hamilton Method)
모스(Edward S. Morse)
뭴렌도르프(Paul Georg von Mollendorff)
바스켓(Sandert Basket)
벙커(Dalzell Adelbert Bunker)
베델(Earnest Thomas Bethel)
베어드(William Martyn Baird)
벨테브레(Weltevree)
보스웰(Boswell)
볼얀(J. Bolljahn)
새토우(Earnest Mason Satow)
손탁(Antoniett Sontag)
스나이더(Lioyd Harold Snyder)
스콧(James Scott)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
알렌(Horace Newton Allen)
애비슨(Oliver. R. Avison)
애스톤(William George Aston)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언더우드(Horace Horton Underwood)
언더우드(Joan V. Underwood)
언더우드(John T. Underwood)
엠벌리(W. H. Emberly)
올링거(Franklin Ohlinger)
존스(George Heber Jones)
졸리(Clara Agnes Lillie Joly)
체임벌린(Basil Hall Chamberlain)
켐벨(Josephine P. Campbelle)
쿤스(E. W. Koons)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포크(George Clayton Foulk)
푸트(Lucius H. Foote)
프램턴(G. Russel Framton)
플랑시(V. Collin de Plancy)
하멜(Hamel)
하지(J. W. Hod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