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의 수사학당의 유학생--고영철(高永喆)
“조선책략”에는 조선 학생들을 북경의 경사동문관(京師同文館)에 보내 서양말을 배워오게 하라는 권고안도 함께 포함되어 있었으나 실상은 오로지 무기제조 기술만을 배우도록 보냈던 것이었다. 그러나 유학생들은 모두 영어를 배울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영어만을 전습한 유학생도 있게 되었다.
당시 오중상(吳仲翔) 관찰이 관할하던 수사학당(水師學堂)은 1880년 이홍장(李鴻章)의 주청에 의하여 복건성(福建省)에 세워진 것이어서 자연히 복건성 태생의 사람들이 많았다. 학과는 항해과와 기관과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입학 연령은 13세에서 20세까지로 총명하고 기력이 있는 사람 중에서 경서(經書) 두서너 권을 읽은 적이 있는 자를 선발하였고 오전에는 영어와 영문, 오후에는 한문을 가르쳤으며 산수도 아울러 가르쳤다. 나아가서 2-3학년은 천문학, 4학년은 기하, 역학, 미적분, 측량, 화학 등을 배우고 5학년에는 외국인 연습선 교원을 따라서 선박, 돛대 다루기 등을 배웠다. 5년의 기한이 찬 뒤에는 영어시험 등을 치룬 다음, 외항 연습선을 타고 바람과 파도를 견디어 내기, 해상 행군, 포진법 등을 익힌 뒤에 능력에 따라서 우수한 자는 유럽에 보내어 더욱 정진케 하여 크게 기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조선 유학생들이 이 수사학당에 입학하여 어학을 배우겠다는 바람에 김윤식은 오(吳) 관찰과 협의한 끝에 1881년 12월 10일 오후 2시 학도 7명을 거느리고 수사국(水師局)을 방문하였다. 복건성 태생으로서 중서학당 출신인 영어교사 허조기(許兆基)와 조렴정(曺廉正)이 조선 학도들을 차례로 불러 들여서 시험을 치렀다. 맨 먼저 조한근(趙漢根)이 불려 들어갔는데, 허 선생이 먼저 발음하는 대로 따라서 발음하게 되면 발음의 맑고 흐림을 분간하고, “좌전(左傳)”을 내주어 한문을 읽혀 본 다음 논문을 지을 수 있는가를 물어서 합당하면 뽑고 그렇지 못하면 퇴짜를 놨다. 시험 결과 조한근(趙漢根), 고영철(高永喆), 김광련(金光鍊), 이희민(李熙民), 등이 합격되어 그 달 17일 7시부터 입학이 되고 나머지 3명의 학생들은 다른 학당이나 공창(工廠)으로 보내졌다.
그런데 이들 유학생 중에서 조한근은 이듬해 2월 1일에 글을 쓰고 외우는 재간이 부족하다는 것을 진정한 뒤 자퇴하면서 전기창으로 옮겼으며 그곳에서 그의 총명한 적성을 나타냈다. 또한 김광련과 이희민도 2월 11일 이전에 자퇴하면서 김광련은 동모창(銅冒廠)으로 옮기고 이희민은 입이 둔하다면서 화학창(化學廠)으로 옮기었다.
그러나 고영철만은 끝까지 남아서 한문이나 양창대(洋艙隊) 공부는 하지를 않고 오로지 영어-영문만을 배웠으며 학당 안에서 매우 재간이 있다는 평판을 듣게 되었다. 그가 수사학당에서 영어를 배운 기간은 1881년 12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의 8개월에 불과하였고, 학습열에 비해서 그 성과는 만족스럽지를 못하였다. 그는 귀국한 뒤 1883년 8월3일 서울재동에 세워진 동문학교의 주사(主事)에 임명되었으며, 민영익(閔泳翊)을 대표로 하는 대미 보빙사절단으로 선발되어 도미했다. 그러나 영어 통역을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외국인 통역관과 비서가 따로 초빙되었다.
어학이란 짧은 시일 안에 완성할 수가 없는 것이고 10년 동안 영어를 배워도 영어 편지 한 장을 쓰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지만, 청국인들은 외국어 학습의 최저 소요 기간을 5년으로 잡고 있었는데 조선 유학생의 유학 기간이 2년에 불과하였으니 계획 자체부터 차질이 있었던 것이다.
고영철은 그 뒤 지방관도 지낸 바 있는데 그의 셋째 아들인 고희동(高羲東)도 어학에 뜻을 품고 1889년에 관립한성법어학교에 들어가서 1903년까지 마르텔(Emile Martel)로부터 프랑스 말을 배우고, 1904년부터 궁내부 주사로 봉직하였다. 그러나 제2차 한일협약이 체결된 후 비통한 울분을 그림과 술로나 풀어 보리라는 생각에서 그림 공부로 전향하여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 귀국한 뒤에는 중앙고보의 미술 교사 등을 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보빙사절의 국제통역
1883년 5월 19일 조-미 조약의 비준서가 서울에서 교환되자, 통리아문 협판 민영익(1860-1914)을 전권대신으로 하는 대미 보빙사 일행 9명이 6월 17일 모노카시(Mocacy)호 편으로 제물포를 떠난 뒤, 도쿄에서 외국인 2명을 초빙하여 8월18일 상선 아라빅(Arabic)호 편으로 요코하마를 떠나서 9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일행 중 조선인으로서 영어를 조금이라도 알던 사람은 고영철뿐이었고, 당소의(唐紹儀) 등과 함께 건너와서 인천세무사의 방판으로 있던 청국인 오예당(吳禮堂)이 영어와 스페인어를 잘하여 청국어 통여관이 고영철과 오예당을 활용하는 3각 통역망도 구성될 수 있었으나 오예당은 통역관으로 초빙된 것이 아니어서 모든 의사소통은 민영익의 말을 유길준(兪吉濬)이 일본말로 일본인 미야오카(宮岡)에게 전하면 영어로 로웰에게 옮기는 4각 통역망으로 언어장벽을 해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