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달인전--변수(邊遂:1861-1891), 최초의 미국 대학 졸업생
갑신정변에 가담했다가 망명한 변수는 1891년 6월 매릴랜드 농업대학(Maryland Agricultural College: 1920년에 매릴랜드 대학에 통합되었다.)을 마치고 미국 농무성의 번역관으로 있던 1891년 10월 22일 불행히도 모교 구내역에서 기차에 치어 근처에 있던 친구 네스빗(Nesbitt) 집에 옮겼으나 밤 11시에 사망했다. 유해는 이튿날 오후 5시에 옛 동창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인트 요셉 성당(St. Joseph's Catholic Church)에 안장되었고 그의 dvna인 시계, 가락지, 지갑 등은 퇴역 해군 제독 애멘(Daniel Ammen)과 미국 공사 허드(Augustine Heard), 명동 성당의 뮤텔(Mutel) 주교의 주선으로 천주교 신자로서 갑신정변 후 숨어 살던 모친과 두 아들에게 전달되었다.
이광린의 “한국 개화사의 제문제(諸問題)”에는 변수를 한국인 최초로 미국 대학을 졸업한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다. 변수는 1882년 김옥균을 수행하여 일본을 시찰했고, 보빙사의 일원으로 미국을 방문하였다가 민영익, 서광범과 같이 미국 장부에서 제공해 준 군함을 타고 유럽, 이집트, 예멘, 인도, 싱가포르, 홍콩 등을 일주하였다. 변수는 이처럼 세계를 일주한 최초의 한국인의 한 사람이기도 했다. 귀국 후 1884년 외아문 주사에 임명되었다가 갑신정변 실패 후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워싱턴의 벌리츠 영학숙(Berlitz School of Language)에서 어학을 공부한 후, 위 서광범의 편지 속의 인물 민주호와 함께 매릴랜드 농업대학에 입학하였다. 민주호(閔周鎬)는 중간에 귀국하고, 변수는 공부를 계속하여 1891년 미국 대학 졸업장을 취득한 최초의 한국인이 되었다. 졸업 후 시민권이 없이 얻을 수 있는 일자리는 미국 농무성의 촉탁 자리였다. 그에게 맡겨진 첫 번째 과제는 90일간의 계약으로 일본의 농업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그가 작성한 보고서는 미국 농무성 통계국의 월보에 “일본의 농업(Agriculture of Japan)”이라는 제목으로 20면에 걸쳐 게재되고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첫 번 연구계약이 끝남과 동시에 다시 중국의 농업에 관한 연구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얼마 후 모교 방문 후 밤늦게 귀가하던 중 대학 정거장에서 기차 사고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의 묘지의 비석에는 “벤수. In Memory of Penn Su. A Corean attached to the First Embassy to their Country, graduated at the M.D. Agr'l College, June 1891. Killed by a locomotive at College Station, Oct. 22, 1891."라고 씌여 있는데, 벤수라는 한글은 변수로부터 한글을 배웠을 미국인 친구가 그렇게 새겨 넣었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