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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달인전(200년전 이땅의)--동문학교 출신, 이채연(李采淵)

리첫 2016. 3. 22. 17:18

영어달인전(200년전 이땅의)--동문학교 출신, 이채연(李采淵)

 

1887년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朴定陽) 일행이 도미할 때는 각국어를 조금씩 알 뿐이었으나, 공사관 생활 중 영어와 춤에 능란하여지고 미국 부호 따님의 청혼까지 받은 이하영(李夏榮)과 영어를 1년간 배운 육영공원 출신의 이완용(李完用) 참찬관, 동문학교 출신의 이채연 번역관이 동행하였고 1885년 4월부터 제중원(濟衆院)<*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에서 의술과 영어를 가르친 알렌(H.N. Allen:1858-1932) 참찬관도 함께 있었다. 당시의 서기관이요 훗날 한성외국어학교장과 YMCA학관 소장(1908)으로서 영어교육에도 기여한 이상재(李商在)는 이렇게 술회한 바 있다.

 

지금은 미국의 유학생도 많고 따라서 영어도 잘하는 사람도 많지마는 그때만 하여도 영어 해득자가 퍽은 귀했었다. 번역관이라 하는 이도 그때 외무아문에서 불과 1년 공부에 지나지 못하여 간신히 쉬운 말이나 할 뿐이라 미국인과 교제를 할 때에는 미국인으로서 조선에 와서 의사 노릇하든 모씨(Allen을 말함)와 같이 통역을 하였는데 그도 역시 조선어가 불충분하여 항상 교제할 때면 미국 반벙어리와 조선 반벙어리가 서로 절장보단(折長補短)하여 의사를 소통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따금 우스운 일도 많았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1892년 5월 조선왕국을 알려던 로어노크(Roanoke) 대학의 학장 드레허(Dreher) 박사가 친구의 권고로 영어가 유창한 이채연 대리공사에게 명함을 건네자, 이채연은 그를 영접실로 공손히 맞아서 조선에 대한 질문들을 대답해 주었다. 그리고 이어서 “I am glad to know you, because I have heard of your college through Mr. Sato, Secretary of the Japanese legation, and from what he has told me, I believe Roanoke would be a good place to send some Korean boys.”라는 말을 했다. 이에 드레허 학장은 즉석에서 이채연에게 자신의 대학을 방문해 줄 것을 제의하게 되었다. 그해 7월 첫째 주일(4-10일)을 세일럼의 루체른(Lucerne) 호텔에 머물면서 서양 옷차림에 상투머리를 한 이채연 부처는 로어노크 대학과 장로교회, 루터파 교회, 공장 등을 순방하였다. 이채연의 부인은 드레허 학장에게, “When I first came to America and went to your churches, I was surprised that the preachers screamed so; they actually act sometimes as of they were mad.”라고 말했었고 이에 대해 학장은, “It was a surprise to us to find this Korean couple manifesting such a fine sense of humor.”라고 대꾸하였다.

 

그들은 조선에 선교사로 떠난 아빙돈(Abingdon) 출신의 데이비스(Miss Selina Davis)와 크리스챤tm버그(Christiansburg) 출신의 정킨(Rev-Wm. M. Junkin)도 만난 바 있다.

 

이채연은 귀국 후 농상공부의 협판으로 있던 1896년 9월 2일 고종황제의 탄신 경축연회에서 행한 연설문을 번역하여 영문 잡지 “코리안 리포지토리(The Korean Repository)”에 실었는데 과연 명문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게일(J.S. Gale) 박사의 한영자전(A Lorean-English Dictionary)의 편찬을 도왔고, 이화여고보의 한문선생을 지낸 신면휴(申冕休)에게 그의 아들 신흥우(申興雨)의 영어영문을 비롯한 학문은 대한 사람 중에서 으뜸이라고 평가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채연은 1895년 5월 29일부터 다섯 차례(* 1442, 1447, 1449, 1456, 1463대)의 한성판윤을 지내는 동안전등과 전차를 가설하고 미국인 크럼(Krumn), 래이몬드(Raymond)와 도시계획을 수립, 시행하였으며 1896년 12월 22일에는 미국 철도 및 광산 회사원들을 경구다리 자택에 초대하여 서양 요리로 만찬회를 베풀어 주한 서양인들의 찬사를 받았는데 그는 한성판윤 재직 시에 별세하였다. 뉴욕의 세인트 존(St. John's)무관학교에 다니고(1903-1905) 샌프란시스코 YMCA 경영의 상무전문학교를 우등으로 1905년 10월 졸업한 이상필(李相弼)은 그의 아들이었을 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