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달인전(200년전 이땅의)--양주동(梁柱東)의 경험담
당시 일인들의 식민지 교육제에서 영어는 겨우 삼년부터 형식적으로 아주 초보적인 몇 마디를 가르쳤기 때문에 초년급생도에겐 ‘영어’란 과목이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중학을 중퇴하고 고향에 돌아와 한문만 공부하다가 기미(己未)운동 직후 다시 별안간 ‘신학문’을 계속할 ‘자각’이 들어 서울 유학의 준비로 ‘영어’를 자급한 것이 나의 그 공부의 시초였다.
자습한 교재는 지금도 분명히 기억되거니와 장(張)모의 저 “무선생영어자통”이란 책이었는데 서울로 오십전에 부쳐 와서 그야말로 ‘무선생’으로 ‘자통’을 시험하였다. 지난 날의 ‘로마자’의 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학습이 한결 수월하여 약 1개월 만에 그 책을 통해(通解)하여 지금 추상(推想)하매 대략 중학 독본 2권쯤의 정도에 달하였으나 "school"과 "listen"의 발음이 왜 ‘스추울’과 ‘리스텐’이 아닌지는 그야말로 심각한 ‘도우브트’였고, 예(例)의 "trade mark"는 두 말이 다 그 책에 없어 그 말뜻을 알 길이 아직도 묘연하다.
평양서 학교를 중퇴하고 돌아올 대에 사가지고 온 영어 소사전은 불행히도 “English-Japanese”가 아닌 “Jap-Eng”여서 (나는 그 때 ‘영-일’과 ‘일-영’의 구별을 몰랐었다) 소용이 되지 못하였다. 그런데 나는 “영어자통”을 혼자 공부해 내려가다가 어떤 날 문득 중대한 ‘의문’과 난관에 봉착하였다라고 하는 건, 그 책 중간쯤 내려가서 어느 과 문법 설명에 다음과 같은 항이 있는 것이다. ‘삼인칭 단수가 주어인 경우에는 동사 끝에 S를 붙이니라’
같은 동사인데 왜 어떤 말이 주어가 되면 S를 붙이느냐 그것은 이상하지만 좌우간 S자를 무조건 붙이라 하니 그대로 덮어놓고 붙이기로 하고 또 주어란 말과 ‘단수’란 말의 뜻은 대강 짐작하겠으나 문제는 ‘삼인칭’이란 파천황(破天荒)<* 이전에 아무도 한 적이 없는 일을 함. 미증유(未曾有).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새 문자의 뜻에 있다.
삼인칭? 삼인칭! 세 사람이 일컫다란 대관절 무엇인가?
나는 그 때 십팔세의 헌헌(軒軒)한 장부(丈夫)<* 외모가 준수하고 헌거로운 사내>요, 더군다나 그 학력은 비록 한문학뿐일망정 이미 사서오경(四書五經),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섭렵한 ‘대가’인데 이 간단한 한문 석자의 결합인 ‘삼인칭’이란 괴어(怪語)를 알 길이 없었다. 각설, 나는 그 삼인칭이란 난해어의 해석에 무릇 며칠 동안의 심사숙고를 거듭하였으나 해답이 종시 나오지 않았다. 세 사람이 무엇을 일컫는가? 논어(論語)에 ‘삼인행(三人行), 필유아사(必有我師)’라 하였으니 그것을 이름인가? “좌전(左傳)”<춘추좌씨전>에 ‘삼인점(三人占), 종이(從二)’라 하였으니 그것에 관련된 말인가? 그러나 양설(兩說)로는 모두 문법의 설명이 통치 않는다. 그 때 나는 궁여의 일책으로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란 고언(古諺)을 상기하여 밤낮 며칠을 전기 항목만 자꾸 염독(念讀)하여 보았으나 끝내 ‘의자현(義自見)’이 되지 않기로 마침내 겨울날 아침 눈길 이십리를 걸어 읍내에 들어가 일인 보통학교장을 찾아 그 말뜻을 물어 보았으나, 교장씨 역시 모르겠노라고 두 손을 젓는다. 나는 그 때 C선생이 몹시 그리웠으나, 선생은 당시 입옥(入獄)중, 낙망하여 나오는 길에 혹시나 하고 젊은 신임 일인 교원에게 시험 삼아 물었더니, 그가 아주 싱글벙글하면서 순순히 말뜻을 가르쳐 주지 않는가! 가로되, “‘내’가 아닌, ‘네’가 아닌 ‘그’를 제삼인칭이라 하느니라.” 아아, 이렇게도 쉬운 말일 줄은! 그때의 나의 미칠 듯한 기쁨이란!
나는 글자대로 그 젊은 ‘선생’에게 고두(叩頭) 사례를 하고 물러 나왔다. 그러나 나오면서 생각하니 거진 나와 연배인 항차 일인인 그에게 일대의 한인 귀재가 이렇게 무식을 드러낸 것이 한편 부끄럽기도 하고 한편 분하기도 하여, 섬돌을 내려오다가 문득 되들어가 ‘선생’에게 짐짓 물었다.
“선생이여, 그러면 ‘말똥’은 무슨 ‘칭’이나이까? ‘선생’이 머리를 긁으며 고개를 오랫동안 기웃거렸다.
“글세, ‘말똥’도 ‘인칭’일가?”
나는 그날 왕복 사십리의 피곤한 몸으로 집에 돌아와 하도 기뻐서 저녁도 안 먹은 채 밤이 깊도록 책상을 마주 앉아 ‘메모’로 적어놓은 ‘삼인칭’이 뜻을 ‘독서’하였다.
“‘내’가 일인칭, ‘나’와 ‘너’외엔 우수마발(牛搜馬勃)--쇠오줌, 말똥)이 다 삼인칭 야(也)라.”
그건 그렇다 하고 이러한 고심 독학 “무선생영어자통”을 졸업한 후 다음 해에 상경하여 중학교에서 정식으로 영어를 배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