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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달인전(200년전 이땅의)--임병직

리첫 2016. 5. 13. 10:50

영어달인전(200년전 이땅의)--임병직

 

1898년에 15명이 양지(量地) 견습생으로, 1902-1903년에는 통신원(通信院)에 3명이 뽑혀 갔듯이 관리임용령에 해당되는 영어부 졸업생들은 벼슬길이 빨랐다. 관계에는 강대성(姜大星), 유인수(柳仁秀), 한규복(韓圭復)이 탁지부(度支部), 김준봉(金埈鳳), 이정균(李鼎均)이 농상공부, 김상덕(金相悳)은 통신원, 김준식(金俊植)은 우체사(郵遞司), 김인식(金仁植)은 전보사(電報司), 김유동(金裕東)은 내부(內部)에 있었고, 김윤하(金潤夏)는 9품(品), 신태건(申泰建)은 흡곡(歙谷)군수로 있었으며, 오한영(吳翰泳)은 주전원(主殿院), 이중원(李重元)은 인천해관, 안순환(安淳煥)은 전선사(典膳司), 김의균(金宜均)은 한성재판소, 백윤규(白潤奎)는 유년학교, 심의승(沈宜昇)은 무관학교, 홍종무(洪鍾懋)는 주영공사관에서 근무하였고, 임병직(林炳稷)은 해방후 외무장관이 되었다. 교육계에는 이희승(李熙昇) 박사, 배재학당의 김동혁(金東爀), 흥화학교의 서상란(徐相鸞)이 있었고, 의료계에는 김태진(金台鎭), 종교계에는 최상호(崔相浩), Y. K. Moses Yi, 해방후의 정계에는 신익희(申翼熙), 정구영(鄭求瑛)이 있었다.

 

영문학자 양주동 박사도 동경유학 전에 중동학교의 속성과에서 1년 만에 3권까지를 몽땅 배웠으나 워낙에 단기간의 학습이었던 탓으로 완전히 터득할 수가 없었다고 하거니와, 한성외국어학교(영어부)에서 3년동안 5권을 배우는 한편 YMCA 영어전문과에서 “스텝 리더스(Step Readers)”와 “타벨 영문법(Tarbel's Grammar)” 등으로 보충수업가지 받았던 임병직 박사는 도미 유학길에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 간부들이 주선해준 미국 부호가정의 하우스 보이로 고용되었으나 말을 못 알아듣는다고 4일 만에 해고된 후 마운트 허몬 학교(Mount Hermon School)로 가는 도중에 겪은 고통은 식사와 언어가 가장 컸다. 그는 “미국인이 날 보고 무엇을 지껄이는데 그것이 어찌나 빠른지 바람이 지나가 듯 하여 그 뜻을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미국인이 무엇이라고 지껄이면 그저 ‘예스, 예스’ 만을 연발하고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입학 후에도 책은 그런대로 대강 읽어 뜻을 알 수 있었으나 선생이나 친구들의 말이 어찌나 빠른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선생님의 개인지도를 받게 되어 교내의 각 단체 대항 웅변대회에서 2등상(15$)을 차지하게 되었다고 한다.